노년기 들어 지나간 시간 반추해보면
삶을 구속했던 욕망들과 마주하게 돼
새로운 열정으로 기억의 굴레 벗어나야

▲ 김상곤 전 울산시감사관

“아무래도 나는 무엇엔가 얽매여 살 것 같으다.” 요즈음 황동규가 그의 시에서 고백한 말이 자주 입속에 맴돈다. 젊은 시절 읽은 시구가 노동의 짐을 부려놓은 은퇴자의 뇌리에 새삼 떠오르는 까닭은 무엇일까. 직업과 같은 사회 구성원의 의무로부터 벗어나는 것이 삶의 자유로움을 가져다 줄 것이라는 믿음을 다시 돌아보게 되면서 부터다. 자유로움이라는 것이 시간적인 한가함 보다는 정신적인 요소에 더 많이 의존한다는 것을 인식하였기 때문이다. 흔히 나이가 들면 지혜의 깊이가 조금은 더해져서 젊은 시절보다는 여유롭고 자유로울 것이라고 짐작한다. 그러나 경험의 양이 항상 지혜로 연결되는 것은 아닌 것 같다. 의욕이 충만한 젊은 시기뿐만 아니라 새로운 경험이 줄어드는 노년의 시기에도 산다는 것은 항상 그만의 무게를 간직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나간 시간을 되돌아보고 그 의미를 반추하는 시간이 많아지면 자신의 삶을 구속해온 자잘한 욕망들이나 환경들이 그 모습을 뚜렷하게 드러내게 된다. 지난날 무심코 넘겼거나 억눌러 왔던 기억을 다시 불러서 조금씩 음미하고 평가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기억을 재생하는 이러한 일들이 앞으로의 시간들에 대한 자세를 새롭게 하는 긍정적인 효과도 있지만 더러는 과거의 아픔에 대한 책임을 누군가에게 전가하거나, 어떤 사건에서 자신의 과오에 대한 변명거리를 찾아내는 편집적인 기능을 하기도 한다.

오랜만에 먼저 은퇴한 선배를 만난 적이 있었다. 몇 마디의 안부인사와 더불어 살아가는 이야기를 시작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사회적 지위와 다양한 경험이 포함되어 있는 지난 시간으로 돌아가게 된다. 그 중에서도 자신의 바람과 꿈이 가장 짙게 배여 있는 시간을 화제로 올린다. 그 선배도 자신의 삶에 영향을 미친 어떤 시기를 어제 일처럼 묘사하고 있었다. 그 이야기 속에는 자신의 진로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 사람들이나 사건들에 대한 아쉬움이 짙게 서려 있었다.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아니나 퇴직 후에도 아직 남아있는 지난 시간의 흔적이 너무나 생생하여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그리고 두려웠다. 나에게는 저런 기억이 남아있지 않다고 장담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의 삶을 정리하고 의미를 부여할 때 지난 시간 중에서 가장 찬란했던 순간들을 중심으로 모습을 그리려 노력한다. 그래서 그 시간 속에서 겪은 좌절은 평생을 두고 잊히지 않는 사건이 되고 만다. 그러다보니 의미 있는 삶이란 곧 젊음 속에서 이루어진 것들이며 젊음을 잃는 것은 곧 가치 있는 시간으로부터 멀어지는 것이 된다고 믿는다. 지난 시간에 대한 짙은 회한도 이러한 생각의 연장선에 위치하는 것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젊은 시절이라고 항상 자유롭고 열정에 차 있는 시간만은 아니다. 세상의 변화에 참여할 수 있는 젊음이 지속되는 동안에는 지난날의 기억보다는 미래에 대한 예견이 삶을 지탱한다. 그리고 그 예견과 현실은 항상 어긋나기 마련이다. 경험에 비추어 보아도 끊임없이 다가오는 현실의 짐들이 너무 버거워 항상 다른 곳으로 눈을 돌리며 살아온 시간이 많았다. 좀 더 높은 곳, 좋은 곳으로 가서 가능한 많은 자유를 누리려고 꿈을 꾸는 것도 다 이 때문이다. 꿈과 경험의 불일치로 인한 염려와 불안이 젊은 시기의 특징인지도 모른다.

우리는 누구나 자신의 삶이 자유롭기를 희망한다. 젊은 시절에는 욕망을 최대한 실현하여 자신의 존재가치를 높이는 것이 자유라고 여긴다. 노년이 되면 자신의 욕구를 충족하면서 자유를 느끼기 보다는 내면의 욕구를 줄이면서 자유로움을 늘이려 한다. 그러나 자유나 해방감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바라지 않는 상태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새로운 열정을 만들어 내는 과정에서 오는 것인지도 모른다. 새로운 열정이 동반된 창조적인 활동이 우리의 시간을 기억의 굴레로부터 구해 줄 것이라 믿는다. 김상곤 전 울산시감사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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