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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기획특집지오그래픽 태화강
[지오그래픽 태화강]반구대암각화, 국보 지정 이전부터 ‘민족기록 문화 소재’ 주목-다시 읽는 太和江百里 : 25. 대곡천과 반구대 암각화(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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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20.01.09  21:1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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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창락 화백 작품 <울주 반구대 암각도>

김창락 화백의 ‘울주 반구대 암각도’
한국학중앙연구원 소장 민족기록화
선사인 제의 의식, 사실적으로 묘사
풍요·다산 기원했던 성소임 알려줘

포경 알려진것보다 수천년 앞선 그림
울산만, 7천년전부터 고래사냥 입증
1970~1971년 동국대 문명대 교수팀
천전리 각석·반구대 암각화 첫 발견


◇반구대 암각화, 고래, 그리고 울산사람들

반구대 암각화(국보 285호)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잘 알려진 암각화다. 특히 사연댐을 축조한 뒤에는 암각화가 해마다 물에 잠겨 입에 오르내리고 있다. 암각화를 살리기 위해 사연댐의 물을 빼야한다는 주장과 물을 빼면 시민들의 물이 고갈된다는 주장이 엇갈리면서 해묵은 논쟁이 계속되고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반구대 암각화가 전 세계적으로 중요한 최고의 문화유산이라는 점은 틀림이 없다는 것이다. 정부와 울산시도 반구대 암각화를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고 있다.

반구대 암각화가 매우 중요한 위치에 있는 이유는 인류의 고래잡이 시기를 엄청나게 앞당겼다는 것이다. 반구대 암각화가 외국 학계에 알려지기 전까지, 인간이 바다에서 처음으로 고래를 사냥한 시기는 10~11세기로 추정되고 있었다. 그러나 반구대 암각화는 이 보다 수 천 년이나 앞선 그림으로 판명됐다. 이 암각화는 인류 최초의 포경유적일 뿐만 아니라 북태평양 연안지역의 선사시대 해양어로 문화를 이해하는데도 매우 중요한 유적으로 평가되고 있다.

지난 2010년 한국문물연구원이 했던 울산 황성동 패총 발굴조사에서는 고래사냥을 실증적으로 밝혀주는 ‘작살이 박힌 고래 뼈’가 출토됐다. 이는 반구대 암각화의 제작연대를 추정해볼 수 있는 결정적인 물증자료라고 할 수 있다. 이 작살 박힌 고래 뼈는 과거 울산만과 해안지역에서 적어도 7000년 전부터 고래사냥이 이루어졌다는 것을 입증하고 있다. 그렇다면 반구대 암각화에 그려진 고래 그림들은 당시 울산 앞바다에서 고래를 잡던 울산 선사인들이 그린 그림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 반구대 암각화 하상부 발굴조사 시 전경.

◇반구대 암각화의 발견

바위그림은 ‘바위에 다양한 방법으로 표현된 그림’을 말한다. 바위에 물감을 사용해 그린 그림을 ‘암채화(岩彩畵)’, 단단한 도구로 새긴 그림을 ‘암각화(岩刻畵)’라고 한다.

암각화는 바위와 관련된 민간신앙의 흔적이나, 선사시대 사람들이 바위나 돌에 의도적으로 표현한 그림이라고 할 수 있다. 암각화의 제작 기법은 여러가지가 있다. 단단한 도구로 바위 표면에 충격을 가하는 쪼기와 마찰을 이용한 긋기, 갈기, 돌려파기 등이 있다. 현재까지 우리나라에서 발견된 암각화는 전국적으로 약 30여 곳이 알려져 있다.

반구대 암각화는 동국대학교 문명대 교수팀이 최초로 발견했다. 1970년 12월24일 동국대학교 박물관 조사단은 울주지역 불교유적 조사를 위해 대곡천 일대를 방문했다. 신라시대 원효대사가 머물렀던 곳으로 알려진 반고사터를 찾기 위해서였다.

당시 조사단은 마을 주민(최경환)의 제보로 반고사터 대신 천전리 각석을 발견하는 개가를 올렸다. 이어 이듬해인 1971년 12월25일 문명대, 김정배, 이융조 교수 등은 천전리 각석을 답사하다가 마을 주민(최경환, 손진봉)의 도움을 받아 반구대 암각화를 발견하게 됐다.

당시 반구대 암각화는 지난 1965년 12월 준공된 사연댐에 의해 매년 물 밑으로 가라앉았다가 나오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반구대 암각화 앞의 선사인들

지난 2018년 10월 반구대포럼(상임대표 울산대 이달희 교수)은 귀한 사진 한 장을 언론에 내놓았다. 바로 김창락(1924~1989) 화백이 그린 <울주 반구대 암각도>였다. 반구대 암각화의 풍경을 담은 이 그림은 한국학중앙연구원이 소장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유화로 그린 이 작품은 300호 크기로, 몇 점의 다른 민족기록화와 함께 연구원 대강당 복도에 <반구대 풍요제>라는 작품명으로 전시돼 있었다. 당시 작품 소재는 국사편찬위원회의 자문과 사학자로 구성된 고증위원회와의 협의 등 까다로운 과정을 거쳐 결정된 것으로 알려졌다.

반구대포럼은 “1978년 작(作)인 이 그림 소재는 1973~1974년에 결정된 것으로 추정되는데, 이는 1971년 문명대 동국대 교수팀이 암각화를 발견한지 불과 2~3년 만이었다. 반구대 암각화가 국보로 지정되기 훨씬 이전에 민족기록 ‘문화’ 편의 소재로 선정된 것은 다소 의외다”고 밝혔다.

그림을 보면 대곡천이 유유히 아래로 흘러가고 맞은편에는 거대한 수직암벽이 있다. 수직암벽 위에는 지붕 같은 돌출 바위가 있고, 아래에는 너럭바위가 널려 있다. 멀리 한실마을 방향에는 거대한 암벽들이 세워져 있다.

또 그림에는 60여명의 선사인들이 다양한 역할과 모습으로 등장한다. 절벽에 사다리를 놓고 바위그림을 새기는 사람과 옆에서 이를 돕는 여러 명의 사람들, 고목나무 아래에 제단을 마련하고 샤먼의 주도 하에 제의 의식을 주재하는 부족장, 그리고 부족민들 수십명이 행사에 참석하고 있는 모습이 사실적으로 그려져 있다. 사연댐의 물이 빠지면 반구대 암각화 주변의 풍경이 지금과 똑같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 그림은 40여년 동안 외부에 알려지지 않았던 그림이다. ‘민족기록화’는 군사정부 시절인 1967년부터 1979년 사이에 당대 최고의 동서양 화가들을 위촉해 우리 민족의 국난극복과 경제발전상 등을 그림으로 표현한 것이다.

이달희 대표는 “이 장소가 선사인들의 풍요와 다산을 기원했던 성소(聖所)임을 잘 보여주고 있다”고 말했다. 글=이재명 논설위원·사진=이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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