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차영일 장생포 아트스테이 문학입주작가

울산에서 나고 자랐다. 문화예술 생태계를 마련하려는 지방의 많은 청년이 그러하듯 성인이 된 후로는 문학이라는 꿈을 좇아 서울과 고향을 오가는 시간을 반복했다. 가끔 고향을 떠난 시간을 가늠해보곤 한다. 인생을 분량으로 나누자면 작은 부분이라고 하는 게 옳겠지만, 문화를 기억하는 관점에서는 전부인 듯 여겨질 때의 당혹감이 몰려오기도 한다. 문화예술이라는 생태계에 온전히 진입하지 못했다는 소외감은 고향과 서울을 구분할 때 더 분명해지곤 했다. 할리우드와 아스팔트 키드로 자라다가 오렌지족이라는 X세대를 지나면서 시대는 청년을 콘텐츠의 미래로 여겼다고 믿었으니까. 그럼에도 나는 왜 문화에 연결되어 있지 않나, 하는 자괴감은 고향에 있을 때 더 선명해지는 것이 사실이기도 했다.

어린 날, 서울에서는 스스로를 이민자 취급을 하기도 했다. 그래야만 생활자로서, 혹은 단독자로서 외지에서의 긴장을 유지할 수 있다고 믿었다. 어느 날은 누군가의 묘비명처럼 우물쭈물하다 불운한 결말에 도달할 것 같다는 불안감에 시달렸다. 이민자와 타향이 같을 수는 없지만 표식의 방법은 비슷하다. 어떤 의미로 훨씬 더 감성적일 수 있고, 반대로 더 연대함으로써 덜 고독해질 수도 있다. 나는 과감하게 덜 고독해지는 방법을 찾기로 했다. 그리고 장생포에 왔다. 장생포 아트스테이의 입주작가가 되었다.

며칠 전, 새해를 맞아 서울로 올라가서 오랜만에 소설가들과 함께 글공부를 했던 문우들을 만났다. “어디에서 지내?”라는 소설가의 인사에 “장생포에 있습니다.”라고 무의식적으로 대답했다. “고래?”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문우들은 얼마간 전국을 떠들썩하게 한 고래와 울산 뉴스에 관해 한마디씩을 했다. “아트스테이에 문학분야 입주작가로 있습니다.”라는 간략한 소개를 하자마자 무리 중 한 사람이 “KTX 타고 가면 세 시간도 안 걸리네. 가깝네.”라는 말을 했다. 이미 모바일로 검색을 해서 거리까지 파악을 한 뒤였다. “가깝네”라는 말이 묘한 친밀감을 불러왔다.

고래포경금지와 환경난민이 발생해서 쇠락해진 장생포가 문화예술로 재생되고 있다는 설명이 다 끝나기도 전에 그들은 이미 정보를 파악한 양 “나도 난민인데 끼워줘.”라고 했다. 누군가는 이미 내가 입주작가로서 전시한 작품을 휴대폰으로 읽고 있었다. 나는 ‘신진여인숙으로 온 이민자’라는 제목으로 결과보고전을 발표했던 때가 떠올랐다. “하긴 우리 모두가 문화예술 난민이지.”

시대는 문화를 연결하는 공동체를 꿈꾸고 있다. 예술가들은 단독자로 장생포에 와서 문화라는 공동체를 경험한다. 이미 연결돼 있다는 것을 경험한 그들은 장생포를 가깝게 인지한다. 실제로도 대교가 연결되었고, 이십여 분이면 시내와도 연결된다. 단지 지금은 서울 사람들도 “가깝네.”라고 하는 곳을 울산 사람들이 멀리 있다고 여길 정도로 덜 알려졌을 뿐이라는 난제가 있을 뿐이다. 그제야 나는 장생포를 비로소 알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내가 쓴 문장에도 있었다. “그때 고개를 숙이지 말라는 말을 들었다.”라고. 울산에 있으면서도 장생포를 몰랐던 나는 낙향해서 아트스테이에 입주하면서 고개를 들고 싶었다. 나는 오랜만에 얼굴을 내민 또 다른 소설가가 “요즘 어디에서 지내?”라는 인사에 고개를 들며 대답했다. “저는 장생포에 있습니다.”라고. 차영일 장생포 아트스테이 문학입주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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