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적 이해따라 너무 경직된 사회
임금 누군지도 모르는 격양가처럼
유머 있는 가벼운 사회로 변화해야

▲ 정명숙 논설위원실장

우리 사회가 너무 심각하고 무겁다. 평범한 사람들도 법무부 장관의 검찰인사에 대한 의도를 이해하지 않으면 동료들과의 점심식탁에 앉을 수가 없다. ‘하명수사’라는 어렵기 그지없는 단어도 어느새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용어가 됐다. 오랜만에 만난 지인과의 가벼운 저녁식사 자리에서도 추미애 법무부 장관과 윤석열 검찰총장을, 그리고 조국 전 법무부장관과 문재인 대통령 사이의 숨은 방정식을 풀어야 한다. 어느 도시에 살든 이성윤 서울중앙지검장과 최강욱 청와대 공직기강비서관 이름 정도는 알아야 뉴스가 귀에 들린다. 준연동형비례대표제라는 복잡한 선거제도를 알아야 하고 자칫 ‘꼼수정당’에 속지 않도록 경계심도 가져야 한다. 그나마 여기까지라면 다행이다. 실컷 공부하고 정보도 수집해서 나름 정답이라고 내놓으면 그 다음엔 좌우 어느 편인지를 따진다. 옳은가 그른가는 뒷전이다. 좌든 우든 어느 쪽도 아니라면 괜찮을까. 아니다. 어정쩡한 회색으로 살기도 어렵다. 양쪽 모두에서 ‘왕따’되기 십상이다. 그러니 정치가 있는 곳엔 웃음이 사라진다.

정치에 관심을 안 두면 되지 않느냐고. 점점 더 정치가 우리 실생활 깊숙이 스며들고 있으니 그럴 수도 없다. 사실(팩트)의 상징인 숫자(경제지표)마저도 정치적인 배경을 이해하지 못하면 해석이 안 된다. 경제전문가나 경제학 교수의 유창한 설명도 소용없다. 좌우 어느 편인지를 먼저 알아야 그 말의 의미를 유추할 수 있다. 이미 온 국민의 관심사가 된 부동산 문제는 더 복잡하고 무겁다. 정부의 부동산 정책을 모르면 그저 살 집 하나 장만하기도 어렵다. 김현미 국토부 장관의 속내도 알아야 하고 김상조 청와대 정책실장과 이호승 경제수석의 성향도 알아야 한다. 그 변화무쌍함에 웬만해선 따라잡지도 못한다. 하루하루가 전쟁 같은 경쟁이다. 가벼운 위트와 유머는 아예 돈에 매몰돼 버렸다.

TV속 예능프로그램조차도 무겁다. 가벼운 말솜씨로 시청자를 웃기는 것은 아예 실패다. 어려운 분장을 불사하는 ‘몸개그’로도 충분치 않다. 오지를 찾아가 목숨 걸고 위험과 부딪쳐서 겨우 웃음을 찾아낸다. 난데없이 반짝이 옷을 입고 시장통에서 몸을 흔들며 노래라도 불러야 웃어준다. 사적 공간인 집안을 속속들이 공개하고 부모자식까지 동원하는 것도 예사다. 하다못해 숟가락 하나 들고 무작정 남의 식탁이라도 쳐들어가야 한다. 감성적 공감이면 충분할 음악프로그램조차 대결 없이는 존속할 수가 없다. 죽을힘을 다해 목청을 높여 상대를 눌러야 뜬다. 드라마도 오로지 ‘돈’이고 ‘경쟁’이다. 얽히고설킨 가족사를 넘어 살인까지 예사로 저지르는 무겁고도 자극적인 이야기뿐이라 보는 것도 지친다. 뻔한 전개에도 ‘촌므파탈’ 황용식의 요령 부리지 않는 우직한 사랑(동백꽃 필 무렵)이 유일하게 위로이고 격려였다. 우리 사회가 다시는 ‘전원일기’ 같은 가볍고도 융숭깊은 드라마를 받아들이지 못할 것이라는 불길한 예감이다.

우리는 4300여년 전 ‘요순시대’를 태평성세의 대명사로 꼽는다. 부족국가시대 중국에 있었던 요(堯)임금과 순(舜)임금의 시대를 일컫는 말이다. 오늘날까지도 우리는 이들 두 임금을 이상적 군주로 숭앙하지만 당시의 백성들은 군주의 존재도 몰랐다고 한다. ‘해 뜨면 일하고(日出而作), 해 지면 쉬고(日入而息), 우물 파 물 마시고(鑿井而飮), 밭 갈아 내 먹으니(耕田而食) 임금의 힘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다더냐(帝力于我何有哉).’ 그들은 땅바닥을 치며 장단을 맞추어 ‘격양가(擊壤歌)’를 불렀다는데. 대통령은 말할 것도 없고 장관에다 청와대 수석, 검찰총장, 지검장까지 알아야 하는 이 시대는 분명 태평성세는 아닌 게다. 격양가처럼 그들을 모른 채 가볍고 단순하게 웃음을 머금은 채 살 수 있는 시대는 올까.

정명숙 논설위원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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