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정숙 주부·울산시 중구 다운동

오랜만에 찾은 통도사다. 제법 쌀쌀한 날씨인데 정월대보름이고 토요일이라 사람들이 많다. 나는 일주문 앞에서 내려 걸어 들어갔다. 이 길을 걸어가면 마음이 편안해지고 머리가 맑아진다.

일주문을 들어서면 소나무 터널이 나온다. 그 길은 피부만 봐도 세월의 흔적을 알 수 있는 붉은 노송들이 내려다보고 있다. 하늘로 올라가기 위해 용트림하는 소나무, 우아하게 발레를 하는 소나무, 계곡 쪽으로 기울어져 잘 생긴 바위와 대화하는 소나무 등 감탄사가 저절로 나온다.

사천왕문 앞에 왔을 때는 여전히 마음이 아프다. 천년도 더 산 느티나무가 쓰러져 밑둥만 남아 보호망이 쳐져 있기 때문이다. 사계절을 다양한 모습으로 우리에게 보시를 해 준 나무다. 2016년, 오랜 세월 견디느라 몹시도 힘겨워 보여 치료를 하다 갑자기 쓰러졌다고 한다. 천년의 세월을 살아내느라 얼마나 힘들었을까. 비바람을 막아내고, 고찰을 지킨 결과가 밑둥만 남아 이끼를 덮어 쓰고 있어 안타깝다.

보호막 안에 있는 느티나무를 보니 요양병원에 계시는 어머니가 생각난다. 잘 걷지를 못해 넘어져 팔을 다쳐 병원에 들어가셨다. 병실 안은 모두 팔십이 넘은 할머니들이다. 표정은 세상살이를 체념하고 달관한 것처럼 고요했다. 인생의 모든 풍파를 이겨내느라 쇠잔한 몸이 되어 이불을 둘러쓰고 있다. 그분들이 머무는 곳이 느티나무의 보호망이나 다름이 없는 것 같았다.

느티나무가 살아나기를 사대천왕께 빌며 절 안에 들어섰다. 사천왕문 안은 밖과는 대조적으로 화사했다. 홍매화가 피었기 때문이다. 홍매화는 신라의 자장율사가 통도사를 창건하면서 심은 나무다. 자장율사가 심었다고 ‘자장매’라고도 부른다. 수많은 사람들이 홍매화를 보느라고 영각 앞에는 사람들로 북새통을 이루었다.

홍매화에 울타리가 쳐져 있다. 사람들이 사진 찍는다고 당기고 꺾고 매화나무를 아프게해서란다. 연통 같은 렌즈를 돌려가며 눌러대는 셔터 소리에 놀라 가냘픈 홍매화 꽃잎이 파르르 떨며 움츠려 드는 것 같다. 고목에 핀 홍매화를 보면서 아름답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왜 사천왕문 밖의 느티나무처럼 애처롭고 슬픈 생각이 드는지 모르겠다. 얼어붙은 땅에서 350년이 넘도록 새로운 생명을 탄생시키기 위해 숫한 역경을 이겨낸 홍매화라 그런가?

작고 앙증맞은 꽃은 황홀하고 갓 태어난 애기처럼 신비롭다. 꽃샘바람의 질투에 떨고 있는 여린 꽃잎은 아름답다 못해 고귀하다. 홍매화의 자태는 보는 위치와 배경에 따라 다른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 단청 밑에서 보는 매화는 오색 단청을 배경으로 화려하다. 나무 창살을 배경으로 한 매화는 고풍스럽다. 푸른 하늘 밑의 매화는 구름과 한 폭의 그림이다. 사람들의 눈에는 금강계단의 있는 사리보다 홍매화가 더 경이롭다. 눈에 담으면 잃어 버릴까봐 카메라에 담고 화폭에 담는다. 나는 내 마음에 곱게 담았다.

온갖 만물이 각각의 모습으로 태어나 삶을 살다 간다. 느티나무도 천년이 넘도록 비바람에 부딪치고 힘든 세월을 이겨내며 살다 병이 났다. 그 병에 사람들이 한 몫 한 것 같아 미안했다. 치료 받는 느티나무를 보면서 우리 인생과 느티나무가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주의 생명체가 몇 살을 살든 생명의 끈을 놓을 때까지는 모두가 건강하게 살았으면 좋겠다.

새색시의 수줍은 볼처럼 일찍 꽃망울을 터트린 홍매화가 반가운 것은 곧 따듯한 봄이 올 것이라는 희망 때문이다. 지금의 사회가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로 겨울이 끝나가도 봄이 올 것 같지 않지만, 봄을 이기는 겨울이 없듯이 어김없이 봄은 온다. 언젠가는 홍매화같이 영롱하고, 밝은 사회가 되어 기분 좋은 소식들이 있을 거라는 긍정적인 마음이 든다.

홍매화가 추위를 뚫고 꽃망울을 터트려 우리에게 희망을 주듯이 느티나무도 살아나서 새잎을 다는 모습을 보여 줬으면 하는 염원을 해본다. 조정숙 주부·울산시 중구 다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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