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화루(太和樓)가 없어진지 400여년이 되었고, 태화루의 역사적 가치와 의미에 대한 세인들의 관심이 희박해진 것이 사실이나 최근 들어 태화루의 복원에 대한 움직임이 매우 활발하게 논의되고 있다. 이에 뜻있는 많은 분들이 태화루 복원과 관련하여 앞으로 전개될 상황에 대해 많은 기대를 하고 있다.

 사실 울산이 거대 도시로 성장하면서 경제적인 측면은 물론 문화적으로도 다방면의 발전이 있었으나 우리의 귀중한 역사적 유산과 전통문화 부분의 투자에는 상당히 인색했다고 하겠다. 이러한 점에서 태화루의 복원은 울산의 정체성을 확립하는 일이라 생각된다.

 태화루는 명승(名勝)으로서, 고려말 정조 이래 울산 8경(八景)이었고 옛 선비들이 많은 시문을 남겨 문학적 산실의 역할을 해왔다. 오랜 세월이 지나면서 중수를 거듭하였으나 임진왜란으로 인해 불타 없어지고, 오직 현판만이 울산 도호부 객사의 남문루에 걸려 있다가 학성 이씨 종친회에 의해 보관되어 왔으며, 얼마전 이휴정에 다시 화재가 발생했으나 다행히 건재하다고 한다.

 태화루를 세운 연대는 호국불교의 기치를 드높였던 신라 선덕여왕때, 태화사의 창건과 더불어 자장율사가 당나라에서 수도하면서 산동반도의 태화지변을 지나다가 신인(神人)을 만나 호국의 계시를 받고 선덕여왕 12년에 귀국하여 태화동에 있는 사포(絲浦)에 상륙하여 머물렀고, 그것이 인연이 되어 건립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태화루의 연혁을 찾아보면 고려 명종 당시 한림학사 노봉 김극기의 태화루 시서(詩書)에는 300여년 동안 그윽한 경치를 노래하고 조용한 시절을 보냈다는 대목이 있고, 고려사 세가(世家)의 기록에는 성종(성종 16년, 997년)이 8월에 경주에 내려왔다가 9월에 태화루에서 신하들과 잔치를 베풀고 바다의 큰고기를 잡았더니 왕이 돌아가 병을 얻어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그밖에도 조선초기의 문신인 서거정(1420~1488)이 울산강에 이르러 누각을 바라보니 층층절벽 위에 우뚝 서 있어 맑고 푸른 강물을 내려다보고 있는데, 그 빼어나고 장엄함에 감탄하여 물으니 태화루라 한다라고 하여 이에 관한 여러 기록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역사의 흐름 속에 태화루는 풍우에 시달려 여러 차례 중수를 거듭했는데, 태종 1년(1401년)에 안로생과 송광연이 중수하였고, 성종 16년(1485년)에 군수 박부경이 중수하였다는 보한집의 기록이 있다.

 현재 논의되고 있는 태화루에 관한 내용도 분분하다. 우선 지금 이휴정에 보관돼 있는 태화루 현판의 역사적 근거가 임진왜란으로 인해 전소된 태화루에 유독 현판만이 남아있을 수 있는가 하는 부분의 석연치 않은 점이다. 또 태화루가 태종 1년 권근의 기문에 서루와 남루가 있었다고 하나 중건하면서 남루 한 루만 세운 것의 사유가 정확치 않은 점, 도시화에 밀린 나머지 제 위치 선정의 어려움 등의 문제 등 복원에 앞서 많은 고증과 사료를 찾아 이를 바탕으로 해 역사적으로 후한을 남기지 말아야 할 것이다.

 이들 산재한 문제를 해결하고 나서 시행될 태화루 복원은 우리 울산의 오랜 발자취를 찾고 역사와 문화의 뿌리가 있는 지역으로 새로운 인식을 갖는 계기가 될 것이다.

 울산의 중심을 흐르는 태화강을 내려다보며 장엄하고도 아름다운 태화루가 우뚝 들어서고 시민들의 휴식공간이 마련되면, 옛 신라가 불교중흥을 이룬 것처럼 현대의 문화적 도량이 이루어질 것이고, 옛 선비들이 이 곳에서 풍류를 즐기고 문화의 산실을 일구어온 것처럼 다시 우리의 울산 문화가 번창하는 계기가 되고 전국적인 관광명소로 각광받을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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