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윤범상 울산대 명예교수·음악이론가

젊은이들 사이에서 꼰대로 통하는
기성세대들의 ‘나 때는 말이야…’
소위 ‘라떼세대’로 불리는 그들은
현대사 격변 온몸으로 겪은 경험자
50년 전에는 모든 물자가 귀했고
자고나면 바뀌고 바뀌는 세상에
평온한 나날은 거의 없다시피 해
컴퓨터와 휴대폰이 주도한 ICT로
한달 걸리던 외국과의 편지 왕래에
단 1분도 못기다리는 세상이 됐다
50년 후엔 또 얼만큼 바뀌어 있을까

2020년 2월도 지나간다. 졸업시즌이다. ‘코로나19’ 때문에 졸업식이 없는 졸업시즌이 됐지만 50년, 어느새 반세기가 지나버린 그 시절이 어제일처럼 새록새록 떠오른다. 정말 많이도 변했다. ‘나 때는 말이야~’라고 과거얘기를 하는 사람들을 가리켜 요즘 젊은이들은 ‘라떼세대’ 또는 ‘Latte is a Horse’라며 ‘꼰대’로 취급한다는데. 다행히 그들은 신문을 잘 안 본다니, 격변의 세월을 온몸으로 경험한 라떼세대끼리 기억의 방문을 열고 세사잡담(世事雜談)을 좀 해도 되지 않을까.

그 때도 지금처럼 평온한 날이 없었다. 10여 년간 질질 끌어오던 한일회담이 1965년에 이르러서야 체결됐고, 1968년 1월21일 북한특수부대의 청와대 습격사건, 1969년 고교 3년생까지 확대된 군사훈련(교련), 1970년 경부고속도로 완공, 1971년 실미도 사건과 중화학·조선공업태동, 1972년 이후락 비밀방북과 남북공동성명, 시월유신(維新)…. 굵직한 사건들이 줄을 이었다. 일인당GNP가 248달러(북한은 286달러, 1970년)이고, 서울지하철 1호선이 개통(1974년, 평양지하철개통은 1973년)하던 그 시절, 대학생들은 최고의 지식인·지성인 집단이었으니 그들의 주장은 항상 옳다고 평가받았고 따라서 대학가는 조용할 날이 없었다. 에휴, 골치 아픈 일들은 빼고 아스라한 생활기억들만 추려보자.

학교선생님이 나누어주는 ‘가정환경조사서’에는 집에 상수도가 있는지, 전기가 들어오는지, 전축·TV·피아노는 있는지, 사는 집이 자가인지, 부모의 학벌·직업·수입·종교까지 세세하게 적어야 했다. 전화번호 쓰는 칸은 대부분 빈칸으로 제출했다. 핸드폰은커녕 집전화도 없었으니 약속시간에 늦는 경우 연락할 길이 없어 ‘바람맞고’ 헤어진 남녀가 부지기수였다. 사귀는 사이라면 편지를 보내거나 전보를 칠 집주소를 아는 것이 필수였다. 이장희의 명곡 ‘그건 너’도 다이얼식 공중전화가 중심소재다.

서울의 경우, 어쩌다 데이트 기회라도 생기면 행여나 몸이라도 닿을까, 10cm 정도의 거리를 유지한 채 덕수궁 돌담길을 돌고 돌았다. 기껏해야 젊은이들이 모이는 DJ다방에서 비틀즈의 예스터데이(Yesterday), 글렌캠벨의 투데이(Today)를 들으며 투모로우(Tomorrow)얘기를 나누는 것이 고작이었다. 지금 들으면 그토록 조용한 중창곡인 맘마스 앤 파파스(Mamas and Papas)의 캘리포니아 드리밍(California Dreaming)을 너무 시끄럽다고 부모들은 귀를 막고 다녔다.

일자리를 알아보기 위해 연락을 기다려야 하는 무직자들은 동네 다방전화를 명함에 박아야 했고, 그들의 아침 출근처는 당연히 그곳이었다. 전화가 걸려와 마담이 ‘김 사장님 전화 받으세요’하면 다수의 김씨들이 일어나 전화 받으러 카운터로 몰려간다. 아침에 파는 모닝커피는 커피에 날계란 한 개가 섞인다. 영양보충용이다.

자동차도 많지 않았을 뿐 아니라, 띄엄띄엄 보이는 자가용은 모두 검정색, 차주(車主)가 직접 모는 차는 없었다. 운전기사는 대단한 기술을 가진 전문가로 대우받았다. 여자 차장이 차비를 받고 사람들을 실어 나르는 만원버스가 거의 유일한 교통수단이었다. 냉난방은 언감생심(焉敢生心), 땀 냄새, 담배냄새 자욱한 버스는 지금 생각해보면 그야말로 지옥이었다. 가발공장을 중심으로 하는 구로공단 여공(女工)들이 새벽에 구름같이 출근하는 모습은 그야말로 장관(壯觀)이었다.

대학에 입학하니 사촌형이 축하선물을 사주었다. 손 계산기. 인류역사상 처음 등장한 상품이었다. 당시 가격은 국립대학 한 학기 등록금에 필적하는 3만원. 지금의 돈 가치로 하면 300만원쯤 하지 않았을까. 그 손 계산기는 지금은 만 원쯤 할 거다. 모든 게 현금계산이던 그 시절, 술값 외상(外上)할 때 그 계산기를 맡기면 술집주인은 거짓말 좀 보태 현금 내는 것보다 더 좋아했다. 책가방에 테니스 라켓을 꼽고 가는 남학생은 여학생들의 선망의 대상이었으며, 나무로 만든 화구(畵具)케이스를 들고 다니는 여학생 역시 남학생들의 눈길을 끌었다. 그러니 바이올린 가방 정도 메고 다니는 여학생은 범접할 수 없는 부자 집 딸이었다.

때마침 우리나라에 들어온 볼링장은 일부 특수층 젊은이들만 갈 수 있는 고급 사교클럽이었다. 아르바이트 월급 받은 다음날, 용기를 내어 친구들과 우리나라 최초의 볼링장인 한강볼링장에 쳐들어갔다. 휘황찬란한 조명아래 최고스타 신성일과 그 일행이 날씬한 가죽신발을 신고 공을 굴렸다. 핀 뒤엔 웅크려 숨어있던 사람이 주워서 다시 세웠다. 그것만 해도 딴 세상 같았다. 셀프주유소? 패밀리레스토랑? 맥도날드? 노래방? 편의점? CD?…. 그런 단어조차 없었다.

하면, 지난 50년간 우리 주위에 일어난 변화 중 가장 획기적인 것은 무엇일까, 무엇이 변화를 주도했을까. 아무래도 컴퓨터와 휴대폰을 도구로 한 정보통신기술(ICT, Information and Communication Technology)의 등장이 아닐까 싶다. 외국과 편지 한번 주고받는데 한 달 걸리던 것이 1분도 못 기다릴 지경까지 발전한 지금, 사람들 사이의 소통은 오히려 퇴보한 느낌이 드니 아이러니하기도 하다. 지금 고등학교를 졸업하는 학생들이 50년 후엔 과연 무엇을 어떻게 추억할까? 윤범상 울산대 명예교수·음악이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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