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재명 논설위원

자연은 순리를 거스르지 않는다. 삭풍 속에서 봄까치꽃이 피면 이윽고 눈 속에서 매화가 핀다. 또 매화가 만개할 쯤 산비탈에는 노란 산수유가 꽃망울을 터뜨리기 시작한다. 소설가 김훈은 산수유가 피어난 모습을 나무가 꾸는 한 자락의 꿈으로 묘사했다.

“산수유는 존재로서의 중량감이 전혀 없다. 꽃송이는 보이지 않고, 꽃의 어렴풋한 기운만 파스텔처럼 산야에 번져 있다. 산수유가 언제 지는 것인지는 눈치 채기 어렵다. 그 그림자 같은 꽃은 다른 모든 꽃들이 피어나기 전에, 노을이 스러지듯이 모두 종적을 감춘다. 그 꽃이 스러지는 모습은 나무가 지우개로 저 자신을 지우는 것과 같다. 그래서 산수유는 꽃이 아니라 나무가 꾸는 꿈처럼 보인다”<자전거 여행>

잘있거라 산동아 너를 두고 나는 간다/ 산수유 꽃잎마다 설운정을 맺어놓고/ 회오리 찬바람에 부모효성 다 못하고/ 발길마다 눈물지며 꽃처럼 떨어져서/ 나혼자 총소리에 이름없이 쓰러졌네 ‘산동애가’ 중에서(백부전)

▲ 구례 산수유마을.

산동애가(山洞哀歌)는 산수유로 유명한 구례군 산동면의 비극적인 스토리를 담고 있다. 백부전(본명 백순례)의 노래는 구슬프기 짝이 없다. 큰 오빠는 일제 때 징용으로 끌려가고 둘째 오빠는 여순사건으로 처형당했으며, 셋째 오빠는 빨치산에게 부역한 혐의로 잡혀가게 됐다. 이에 백부전은 막내 오빠를 대신해 토벌대로 끌려갔다. 꽃다운 나이에 죽은 순례, 그녀는 지금도 설운 정을 잊지 못해 파스텔 같은 산수유꽃을 흩뿌리고 있다.

산수유는 삼국유사에도 나온다. 신라 경문왕은 왕위에 오르자 귀가 갑자기 당나귀 귀처럼 길어졌다. 왕비를 비롯한 궁궐 사람들은 이 사실을 몰랐지만 오직 모자를 만드는 장인만 알고 있었다. 장인은 평생 이 사실을 남에게 말하지 못하다가 죽을 즈음 도림사 대나무숲에서 대나무를 향해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고 외쳤다. 그 뒤 바람이 불 때마다 대나무숲에서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는 소리가 났다. 왕은 그 소리가 듣기 싫어 대나무를 모두 베고 대신 그 자리에 산수유를 심었다.

꽃이 피어서 산에 갔지요/ 구름 밖에 길은 삼십리/ 그리워서 눈감으면/ 산수유꽃 섧게 피는 꽃길 칠십리

‘산수유 꽃 필 무렵’ 전문(곽재구)

산수유는 2월말부터 피기 시작한다. 산비탈에 ‘노란 구름’이 피어 오르면 경칩(3월5일)도 얼마 남지 않았다. 이재명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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