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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그림이 있는 에세이
[그림이 있는 에세이]신기하고 아름다운 문학 자판기 - 강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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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20.03.05  21:28: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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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기로- 물끄럼이하은作 : 사람들은 감정과 욕망을 분출하고 현실로부터 도피해서 진정한 자아를 실현할 수 있는 이상적 장소를 갈망하곤 한다.

북구청 여권계 옆 벽면에 설치된
감성을 충전하는 문학자판기
짧은 글 버튼을 누르면 잠시 뒤
배출구로 나오는 종이 한 장
종이에 인쇄된 대문호의 한 문장
짧은 유효기간의 반성과 다짐
마음을 함께 담아 잘 접어둔다


매주 두 번씩 북구청에 갈 일이 있습니다. 남구에 살다보니 북구의 공공기관을 찾을 일은 거의 없었습니다. 낯선 버스 정류장에서 내려 횡단보도 보행 신호를 기다리는데 철로 위로 기차가 보입니다. 해넘이 속에 기차는 덜컹덜컹 옅은 소리를 내며 지나갑니다. 규칙적으로 들리는 기차 소리는 따뜻하고 정겹습니다. 청각을 통해 심신 안정에 도움을 준다고 알려진 ASMR(자율 감각 쾌락 반응)을 일으키는 소리라고 합니다. 대숲 소리, 비 오는 소리, 연필 사각거리는 백색소음과 비슷합니다. 기차가 멀리 사라지도록 그대로 선 채 소리를 음미하다가 아쉽게 걸음을 옮깁니다. 다행히 기차는 자주 지나다녔고 저는 기차 소리가 들릴 때마다 퇴근하는 엄마의 발자국 소리를 듣는 아이처럼 귀를 기울이며 평화를 얻습니다.

북구청 앞마당은 꽤 넓습니다. 앞쪽으로 북구문예회관을 두고 형성된 너른 정원은 사계절 내내 멋진 조경을 이루어 이웃 주민들과 이용 시민들에게 좋은 산책로와 운동장 역할도 함께 합니다. 가을이면 국화 축제가 소박하게 열리고 밤이 긴 동절기에는 꼬마 전구로 갖가지 모형을 만들어 불을 밝힙니다. 그래서인지 낙엽이 진 나무가 앙상해도, 눈 없는 겨울의 풍경이 쓸쓸해도 북구청의 정원은 늘 따뜻하고 충만합니다. 사랑의 열매 모양의 조명 장식 앞에서 반짝이는 꼬마 전구들을 지켜 봅니다. 코트 주머니 안의 동전 몇 개가 손 끝에 만져집니다. 북구청 내에 있는 사랑의 열매 저금함에 가진 동전을 모두 털어 넣습니다. 나눔에는 인색함과 어색함이 없어야 하는 줄 알면서도 자율적이고 자발적인 행동에는 영 서툽니다. 저금함 옆에 놓인 붉은 열매 배지 하나를 들어 백팩에 붙입니다. 이 백팩을 쓰는 날만에라도 오늘의 이 마음을 잊지 않겠어요.

구청 본관 한쪽에 작은 까페가 있습니다. 사회적 기업에서 운영하는 곳입니다. 은은한 커피향에 발을 멈춥니다. 서정주 시인의 시, <내리는 눈발 속에서는>의 한 구절이 떠오릅니다. ‘괜찬타, 괜찬타, 괜찬타, 폭으은히 내려오는 눈발속에서는…’. 커피 한 잔을 주문합니다. 한 모금 마시는데 역시, 혀 끝에 녹아드는 따뜻한 첫눈같은 맛. 나도 모르게 나오는 말. 괜,찬,타.

맞은편 여권계 앞으로 걸음을 옮깁니다. 구청에 올 때마다 반드시 들르는 곳입니다. 여권은 이미 있습니다. 여권계 옆 벽면에는 성인 허리까지 오는 작은 기계가 있습니다. ATM 기기와 비슷하지만 달랑 버튼 두 개와 작은 배출구가 있을 뿐입니다. 안내판에 이렇게 써 있습니다. ‘문학감성을 충전하는 문학자판기’.

짧은 글 버튼을 누릅니다. 잠시 기다리니 배출구로 대기표 같은 종이 한 장이 나옵니다. 조심스런 마음으로 글귀를 읽습니다. ‘새가 날아가 버린 뒤에 꼬리를 잡으려는 것은 무리한 짓이다­도스토옙스키’. 티테이블로 돌아와 앉아 곰곰히 생각해 봅니다. 나는 지금 현재를 살고 있는가. 지나버린, 실패한, 포기한 일들을 복기하며 뒷걸음질치지는 않았는가. 작은 종이에 인쇄된 대문호의 한 문장이 나를 즉각적으로 알아차리게 합니다. 짧은 유효기간의 반성과 다짐일지라도 충족합니다. 마음을 함께 담아 잘 접어둡니다.

민원실에 온 많은 이들 중 몇몇이 대기표를 들고 서성이다 호기심에 문학자판기 앞에 섭니다. 무료임에도 잠시 망설이다 조심스럽게 버튼을 누릅니다. 받아든 글귀를 들여다보는 그들의 모습은 모두 순수하고 진지합니다. 엉뚱한 글귀인지 허허, 웃는 어르신들도 있고 긴 글의 종이를 들고 가까운 소파에 앉아 열심히 읽어나가는 임산부도 있습니다. 문학자판기의 버튼을 누르는 순간, 모든 이들은 짧은 독서를 즐기게 됩니다. 시인 나태주의 시구일수도 있고 고대 인도의 잠언일수도 있겠어요. 두 번 곱게 접어 지갑에 끼워넣는 휴가군인의 종이에는 어떤 글이 담겨 있을까요. 못내 궁금하지만 모른 척 합니다.

우연히 문학자판기를 만난다면 바쁘다고 그냥 지나치지 마세요. 짧은 글이라도 좋아요. 바로 지금, 당신의 감성을 채울 시간입니다.

   
▲ 강이라씨

■강이라씨는
·2016 국제신문 신춘문예 소설 당선(당선작 쥐)
·2019 현진건문학상 추천작 수상(수상작 스노우볼)
·소설집 <볼리비아 우표> 출간 (2018)
·테마소설집 <나, 거기 살아> 출간 (2019/ 공저)
·울산시립도서관 성인독서회 <책잇수다> 강사
·한국소설가협회·울산소설가협회 회원
·계간 소설 21세기 동인

 

 

   
▲ 이하은씨


■이하은씨는
·2019 동덕여대 대학원 회화학과 수료
·2017 동덕여대 회화과 졸업
·2019 개인전 생생백야지대: Vivid Liminality
·2019 전시를 위한 전시:객관적 상관물, 동덕아트갤러리
·2019 창원청년아시아미술제 쌀롱전, 창원성산아트홀
·2018 잘나가는 젊은작가들의 대작프로젝트
‘특급소나기’, 울산문화예술회관

경상일보, KSILB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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