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로 인한 패러다임의 전환
비대면·비접촉시대가 불러오는
부적응의 홍역 슬기롭게 넘어서야

▲ 이재명 논설위원

코로나19가 본격적으로 엄습한 1월부터 지금까지 우리 국민들은 대부분 한번씩 악몽을 꾸었을 것이다. 코로나는 그만큼 갑작스럽게 우리들 곁으로 다가왔다. 지난 9일 안철수 대표가 의료봉사를 하고 있을 때 한 아주머니를 만났다. 안 대표가 ‘숨 쉬는 건 불편하지 않나’ ‘통증은 없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아주머니는 “그게 아니라, 어제 제 남편이 죽었다”고 대답했다. 그는 “어제 남편이 죽었다는 연락을 받았는데 그 때 이후로 계속 가슴이 답답해 어떻게 할 수가 없다”고 말했다. “시체를 화장해 버리면 다시 남편의 얼굴을 볼 수도 없는데 병(코로나)이 낫지 않아 장례식장에 참석할 수도 없다”고 했다. 남편도 대면(對面)할 수 없는 악몽보다 더 악몽같은 현실이었다.

지금 우리는 코로나 바이러스로 쑥대밭이 된 터널을 뚫고 지나가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죽거나 병실에서 신음하고 있다. 그럼에도 이 참담한 현실이 언제 끝날지 모른다는 것이 사람들을 더 두렵게 하고 있다. 세계 인구의 70%가 감염될 것이라는 학계의 예고도 나오고 있고, 코로나 변종이 생겨 흑사병 보다 더 무서운 유행이 올 것이라는 소문도 흉흉하게 들린다. 터널의 끝이 도무지 보이지 않는다.

대한신경정신의학회는 최근 일반인, 아이를 돌보는 어른, 자가 격리자 등에게 나눠 줄 마음건강지침을 제작했다. 코로나와 관련된 구체적인 행동요령을 담은 것이다. 예컨대 국민에게 ‘불안’은 지극히 정상적인 감정이지만 ‘혐오’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 등을 알려주고 있다. 그 외에도 ‘불확실함’을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받아들일 것, 가족과 친구, 동료와 소통을 지속할 것, 가치 있고 긍정적인 활동을 할 것, 서로 응원해줄 것 등이 담겨 있다.

끝이 보이지 않는 코로나이지만 이 전쟁도 언젠가는 끝날 것이다. 사스도 끝났고 신종 플루도 끝났으며 메르스도 끝났다. 다만 이번 코로나19는 전대미문의 엄청난 후유증을 남길 것으로 보인다. 특히 생활문화는 ‘코로나 전(前)’과 ‘코로나 후(後)’로 나눌 정도로 판이하게 달라질 것으로 예측된다. 이번 코로나 대유행이 기존 사회 패러다임의 큰 전환을 촉발할 것이라는 얘기다.

패러다임이라는 용어는 미국의 철학자인 토머스 쿤이 그의 저서 <과학혁명의 구조>에서 처음 사용했던 개념이다. 요즘에는 ‘한 시대를 지배하는 인식·이론·관습·사고·관념·가치관 등이 결합된 총체적인 틀’로 사용되고 있다. 패러다임이 한번 뒤집어지려면 경천동지할 큰 변화가 있어야 한다. 예를 들어 그 동안 믿어왔던 천동설이 지동설로 바뀌는 전환점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지금 지구촌은 코로나19로 인해 기존의 인식틀이 확 바뀌는 소용돌이 속에 있다. 그 동안 몇몇 미래학자들이 세상이 크게 바뀔 것이라고 예견했지만 주류 이데올로기를 형성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이번 코로나19는 현대문명을 코로나 전과 후로 극명하게 갈라놓았다.

코로나 전에서 후로 넘어가는 문턱은 바로 ‘비대면·비접촉’이다. 재택근무, 원격진료, 온라인 쇼핑, 온라인 강의, 배달서비스, 무인시스템, 혼밥, 화상회의, 개인 교통수단, 개인공간 확보, 가상 세계 등등. 이제는 사람이 많이 모이는 광장 같은 곳은 혐오 대상지로 분류된다. 우리나라가 세계 최초로 도입한 ‘드라이브스루(Drive Though·DT) 선별진료소’는 비대면·비접촉 진료의 끝판왕이다.

최근 2~3개월 사이에 국민들이 한번쯤 꿔보았을 코로나 악몽은 앞으로 올 패러다임의 전환을 예고하고 있다. 그러한 패러다임의 전환은 바람직하든, 안 하든 기정 사실로 굳어가고 있다. 이미 문턱을 넘어선 ‘비대면·비접촉’ 시대, 이를 극복하기 위해 우리는 또 한번의 심한 홍역을 앓아야 할지 모른다.

이재명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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