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주군 상북면 덕현리는 고헌산을 동쪽에, 영남알프스의 최고산인 가지산과 운문령을 북쪽에 두고 서북에서 동남으로 하천을 따라 형성된 마을이다. 운문재는 덕현리에서 경북 청도로 넘어가는 높이 1천107m의 재이다. 상북읍지에 의하면 운문산 또는 운문재를 일명 가슬현이라 했고, 운문재의 상북쪽인 가슬현에 가슬갑사가 있었다고 한다. 가슬갑사는 세속오계를 전한 유서 깊은 절이다.

 삼국유사의 원광서학(圓光西學)편을 보면 가실사(加悉寺)를 가슬갑(加瑟岬)이라 했다. 이 절을 설명하기를 "혹은 가서(加西) 또는 가서(嘉西)라 하니 모두 방언이다. 갑(岬)은 속언에 고시(古尸-곳)라 하므로 혹은 고시사(古尸寺)라 하니 마치 갑사(岬寺)라고 하는 것과 같다. 지금 운문사 동쪽 9천보 가량 되는 곳에 가서현(加西峴)이 있는데 혹 가슬현(嘉瑟峴)이라고 한다. 현(고개)의 북동쪽에 절터가 있으니 바로 이것이다"고 했다.

 신라의 사량부(沙梁部) 출신인 귀산(貴山)은 화랑출신이었다. 어느날 그는 친한 사이인 추항(?項)에게 이르기를 "우리들이 사군자와 더불어 노는 것도 좋지만 먼저 정심수신(正心修身)하지 않으면 아마 욕을 면치 못하리라. 어진이 곁에 나아가서 도(道)를 묻지 아니하려는가"라고 했다. 때는 마침 수나라로 들어가 유학하고 있던 원광법사가 진평왕 22년(600)에 돌아와 가실사(加悉寺)에 머물면서 칭송을 받고 있었다. 귀산 등이 그의 문하로 공손히 나아가 말하기를 "저희들 속사(俗士)가 어리석고 몽매하여 아는 바가 없사오니 종신토록 계명(誡命)을 삼을 한 말씀을 주시기를 바라나이다"라고 했다. 법사가 말하되 "불계에는 보살계가 있는데 그 종목이 열 가지이다. 너희들이 남의 신하로서는 아마 감당치 못할 것이다. 지금 세속오계가 있으니, 첫째는 임금 섬기기를 충으로써 하고(事君以忠), 둘째는 어버이 섬기기를 효로써 하고(事親以孝), 셋째는 친구 사귀기를 믿음으로써 하고(交友以信), 넷째는 전쟁에 임하면 물러서지 않고(臨戰無退), 다섯째는 생명 있는 것을 죽이되 가려서 한다(殺生有擇)는 것이다. 너희들은 실행에 옮겨 결코 소홀히 하지 말라"고 한다. 귀산 등이 "다른 것은 말씀대로 하겠는데, 다만 살생유택만은 잘 알지 못하겠습니다"고 하자 법사는 다시 "육재일(六齋日)과 봄, 여름철에는 살생치 아니한다는 것이니, 이것은 때를 택하는 것이다. 또 부리는 가축을 죽이지 말 것이며, 또 미물 같은 하찮은 생물이라도 죽이지 않는 것을 말함이다"고 했다. 이에 귀산 등이 "반드시 행하여 감히 실수하지 않겠습니다"고 했다고 한다. 그로부터 2년 뒤인 진평왕 24년(602)에 백제와의 아막성(阿莫城)전투에서 "내가 일찍 스승에게 들으니 선비는 전쟁에 있어 물러서지 않는다고 하였다. 어찌 감히 달아날까 보냐"며 적에게 돌진해 적군 수 십명을 격살하고 전사함으로 신라군을 승리로 이끌었다.

 귀산과 추항이 임전무퇴의 용맹함으로 몸소 세속오계의 본을 보였으나 전투에서는 반드시 이겨야겠기에 살생유택이라 해도 선택의 여지가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한국의 정예군이 평화를 사랑하는 최고의 정병으로 평가받기 위해서는 아무래도 살생유택의 덕목까지 덧입지 않으면 안 될지도 모르겠다.

 

저작권자 © 경상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