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영의 장도와 장인들-(상)73년 장도인생 무형문화재 장추남

▲ 장추남 장인이 은장도 제작공정에 대해 들려주고 있다.

‘울산의 쟁이들’은 ‘세상이 알아주지 않아도 그저 담담하게 그 길을 걸어가는 사람들’에 대한 기록이다.

그들 개인은 똑같은 작업을 이어온 것 이지만 그 속에는 가족과 이웃의 이야기는 물론 우리 도시의 시대적 흐름이 담겨있다.

묵묵히 한 길을 걸어 온 그들에게서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무엇을 찾아 내 기록하는 일은 그래서 중요하다.

울산을 기반으로 오랜 기간 전통문화 분야에 몰두하며 최고의 열정과 기량을 보여준 사람들을 인터뷰하고 그 생애와 기예를 소개한다.
 

 

1930년 일본서 태어나 해방 맞아
조부모의 고향인 병영에 돌아와
17살 때부터 금속세공 기술 배워
6·25전쟁 후 영남 각지 전전하다
1960년대 들어 다시 병영에 정착
전수자 아들과 중구서 공방 운영
온 종일 3평 남짓 공간서 망치질
2019년 울산시 지방 무형문화재
1호 장도장으로 후진 양성 혼신

1930년생. 올해 나이 만으로 90세. 장추남(張秋男) 장인은 그 중 73년을 망치질하며 살아왔다. 그리고 아흔을 목전에 두고 2019년 1월3일 울산광역시 지방 무형문화재 제1호 장도장에 지정되었다. 한낱 장도 기술자이든 무형문화재이든 그는 어제도 오늘도 아마 내일도 온종일 9.9㎡(약 3평) 남짓의 비좁은 작업실에서 망치질을 하고 정으로 쪼고 사포질을 할 것이다. 그것이 울산시 무형문화재 제1호 장도장 장추남의 하루이자 인생이다.

장추남 장인은 1930년 일본 나고야에서 태어나 자랐고, 1945년 해방을 맞아 이듬해 가족과 함께 할아버지의 고향인 병영으로 돌아왔다.

 

“일본서 태어나고. 할아버지 고향이 병영이니까 그래 고향 찾아 왔지. 할머니가 기장 사람이요. 그래 죽어도 우리 땅에 묻힐란다 이래가. 큰아버지는 한국 못 간다 이래가. 할머니 때문에 아버지가 차남인데도 그래 한국에 왔잖아요.”

울산의 달천산은 예로부터 철의 산지로 유명했고 조선 초기 경상좌병영이 설치된 이래 병영은 군사기지였다. 자연스럽게 병영 주변에는 무기를 만드는 야장들이 모여 살았고, 이들은 평소에 금속 세공품을 만들어 팔아 생계를 유지했다. 병영의 담뱃대와 은장도는 이렇게 오랜 역사와 전통을 지니고 있다. 장추남 장인이 돌아온 1946년에도 여전히 병영성 주위에는 유기·담뱃대·숟가락 등을 만드는 장인들이 모여 살고 있었다.

 

“일본서 태어나고 병영이 할아버지 고향이니까 고향 찾아 왔잖아요. 저가 일본에서 태어나서 말도 옳게 못했어요. 그 당시 열일곱 때, 학교 다닐 수도 없고, 집에서 담뱃대부터 배워라 그래서 배웠어요. ‘은삼동구리(담뱃대)’라고 유명하거든요? 아주 고급. 그거를 하게 됐는데 안 팔리잖아요. 안 팔리가 장도 만들어보자. 장도, 목장도 만들어라 이래가. 첨에 목장도 만들 때는 없어서 못 팔았어요. 은이 흔해지고부터는 은장도를 시작했지요. 목장도는 잘 사지도 안 하고. 그래서 지금 이 시간까지 은장도 하게 됐지요.”

장인은 먹고 살 기술을 배우고자 나이 열일곱에 병영의 최순봉 할아버지가 운영하는 댓방(담뱃대 공방)에 들어갔다. 당시 담뱃대 공방은 가정집의 한쪽 방을 개조해 대강 만든 것이다. 공방에는 담뱃대와 목장도·백동장도·자물쇠·농장식 등을 만드는 기술자들이 일하고 있었다. 거기서 처음에는 임차출 장인에게 담뱃대를, 이후 김덕영 장인에게 장도 만드는 법을 배우면서 장도의 길에 들어섰다.

▲ 장추남 장인이 만든 은장도와 작업대, 각종 도구 한가운데 장인의 방석이 놓여있다.

6·25 전쟁이 일어나자 군대를 다녀 온 이후 안강·영천·마산·부산 등지를 떠돌며 일하다 1960년대 다시 병영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형님 장정환 장인과 함께 ‘고정민예사’를 세워 담뱃대와 장도를 만들었다. 처음에는 형님 집 한 쪽에 공방을 차렸는데 지금 그 땅은 밭이 되었다고 한다. 이후 여기저기를 전전하다가 오늘날 울산시 중구 중앙1길 20, 일제강점기에 활동한 울산 출신 대중가수 고복수의 동상이 있는 자리 바로 앞에 자리를 잡고, 아들 장경천 전수자(1961년생)와 함께 공방을 운영하고 있다.

“아침 식사하고 공방에 오고. 집에서 나오기는 정각 7시에 나오거든요. 요게 도착하면 7시 반쯤 됩니다. 그래가 3시만 되면, 2시 반 정도 되면 나가요. 퇴근 해뿌려요.”

장인의 하루는 공방 출근으로 시작한다. 매일 아침 7시에 집을 나서 공방에 오면 7시 반이다. 오후 3시쯤 다시 공방을 떠나기까지 같은 자리에 앉아 장도 만들기, 이것이 365일 주말도 휴일도 없이 반복되는 장인의 일상이다.

한겨울에는 제대로 난방도 되지 않은 작업장에서 작은 난로를 하나 옆에 두고 하얀 입김을 내뱉으며 쪼그리고 앉아 장도를 만든다. 전수자들에게는 추우니까 겨울에는 나오지 말라고 당부하면서 정작 본인은 하루도 빠짐없이 나온다. 심지어 코로나가 기승을 부리던 이번 2월과 3월에도 공방을 떠난 적이 없다.

“전통 이런 거 몰라, 그냥 할 일 없으니까 하는 거지.”

장인을 보러 갈 때마다 그는 늘 장도를 만들고 있었다. 작업실에서도 축제의 전시장에서도 어디서건 망치질을 하거나 조각을 하거나 땜질을 하고 있었다. 은장도의 미래라든가 전통의 보존이라는 이야기는 장인에게 너무 거창하다. 아침에 눈을 떠 다시 잠자리에 들기까지 그 사이에 하는 너무도 당연한 일, 그것이 장인에게 장도를 만드는 일이다. 조선시대 공인의 삶도 바로 이렇지 않았을까.

▲ 노경희 전문기자·울산대 국어국문학부 교수

병영에는 그의 형님 장정환 장인을 비롯해 임원중(울산시 무형문화재 장도장)·임동훈(전수조교) 부자, 허균·허명 부자 등 여러 장인들이 뛰어난 기술을 지니고 활동하였다. 그러나 2020년 4월 현재 울산 병영 장도의 기술을 온전히 재현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장추남 장인뿐이다. 오늘날 울산 시민 중에 병영 장도의 존재를 아는 이들은 과연 얼마나 될까. 그 존재를 아는 이들이 모두 사라지는 날, 병영의 장도는 이 세상에서 그 자취를 감출 것이다. 조선시대를 이어 온 울산 병영 장도의 맥이 90세에 이른 한 노인의 왜소한 어깨를 무겁게 짓누르고 있다.

글=노경희 전문기자·울산대 국어국문학부 교수 사진=사진작가 정웅 / 표제 서예가 김중엽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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