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국가 국민의 기초적 의무이자
참정권행사의 가장 중요한 출발점
행사여부는 유권자의 자율적 권리

▲ 허영란 울산대학교 역사문화학과 교수

‘기권은 국민의 수치, 투표는 애국민의 의무’.

이것은 1948년 5월10일에 실시된 우리나라 최초의 총선거 홍보 구호였다. 제헌국회를 구성하기 위해 치러진 5·10총선은 우리 역사상 최초의 보통선거이기도 했다. 유엔소총회 결의에 의해 치러진 이 선거는 성별과 신앙을 묻지 않고 21세 이상의 성인에게 동등한 투표권을 부여했다. 1919년 상해임시정부를 수립할 때부터 지향했던 보통선거가 마침내 실현되었다.

보통선거가 민주주의의 기본 원칙으로 확립되기까지는 오랜 고난의 역사가 있었다. 미국의 경우, 1776년 독립선언 직후의 선거법에서 ‘선거권은 백인, 남성, 21세 이상, 재산 소유자, 납세 능력이 있는 자에게만 부여된다’라고 하여 선거권을 제한했다. 특히 여성 참정권의 역사는 보통선거 원칙이 얼마나 힘겹게 획득된 가치인지를 말해준다.

민주주의 선진국이라는 유럽에서도 20세기 초까지 대부분의 국가에서 여성에게는 참정권이 없었다. 영국에서는 여성참정권론자(서프러제트 Suffragette)의 극렬한 투쟁 끝에, 1918년에 21세 이상 모든 남성과 일정 자격을 갖춘 30세 이상 여성에게 참정권을 부여하는 국민투표법이 통과되었다. 모든 여성에게 남성과 동등한 참정권이 인정된 것은 1928년이었다. 미국에서 여성 투표권이 보장된 것은 1920년이었고, 흑인에게 투표권이 주어진 것은 한참 더 뒤인 1965년이었다. 프랑스나 일본에서도 제2차 세계대전 종전 뒤에서야 보통선거가 실시되었다.

대한민국은 일제의 식민지배에서 벗어나 실시한 첫 선거에서 보통선거 원칙을 적용했다. 선거 연령을 높여서 참정권을 제한하려는 세력이 있었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그렇지만 5·10선거는 남한에서 단독정부를 수립하기 위한 선거였기 때문에 선거 자체에 대한 반대가 많았다. 김구와 김규식을 비롯한 중도파 민족주의자들은 선거 참여를 거부하고 남북협상을 추진했으며, 좌익은 ‘단독선거 단독정부’ 반대투쟁을 맹렬하게 펼쳤다.

막상 선거가 실시되자 투표율이 무려 95.5%나 되었다. 일제 치하의 관치주의 영향이 컸고 관권선거라는 비판도 있었지만, 일반 국민의 높은 정치 참여 열의를 반영했다는 것 또한 의심의 여지가 없다. 출마자의 기호를 막대기 개수로 표시했는데, 다수 유권자가 아라비아숫자를 읽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수십 개의 정당이 난립하고 흑색선전이 난무했지만, 늘 그렇듯 선거 결과에는 일정하게 민심이 담기기 마련이었다.

5·10선거에서도 예상을 깨고 미군정 하에서 세력을 키웠던 한민당이 참패했으며, 무소속 당선자를 끌어들여 전체 의석 3분의 1 가량을 차지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승만 지지 세력과 중도파 민족주의계 무소속이 각각 3분의 1 가량을 차지했다.

선거가 치러지는 당대에는 주로 정치세력 간의 극단적인 경쟁과 대립이 부각되고 출마자 개개인의 당락에 관심이 집중되기 마련이다. 그렇지만 대한민국 선거의 역사를 돌이켜보면 그 결과는 언제나 ‘민심’을 비춰주는 거울 역할을 해왔음을 알 수 있다.

이번 4·15총선에서는 제도적으로 투표의 대표성을 더 높이기 위해 투표 연령을 만 18세로 낮추었고 새로운 비례대표제를 도입했다. ‘꼼수’라는 비난과 더불어 비례위성정당의 정당성에 관해 논란이 많고 차후에 제도 개선이 필요해 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그런 한계에도 불구하고, 보통선거는 여전히 집단적 의미의 ‘민심’을 표현할 수 있는 가장 현실적이고 신뢰할 수 있는 민주주의 제도이다.

투표를 흔히 ‘민주주의의 꽃’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투표권의 행사 여부는 전적으로 유권자의 자율적 권리이다. 거기에는 기권할 권리까지도 포함되어 있으며, 낮은 투표율 또한 민심을 비춰주는 거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참정권의 역사가 말해주듯이 민주주의는 화석화된 제도가 아니라 시민의 참여를 양식으로 삼아 쉼 없이 자라는 나무이다. 그러므로 민주주의를 키우고 꽃 피우며 그 열매를 향유하고자 하는 시민에게, 투표는 기초적인 의무이다. 참정권의 행사가 투표에만 국한되어서는 안 되지만, 투표는 참정권을 행사하는 가장 중요한 출발점이기 때문이다. 허영란 울산대학교 역사문화학과 교수

 

저작권자 © 경상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