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영의 장도와 장인들 - (하)오동상감장도를 만드는 사람들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임원중·허균·장추남 장인의 공방
고려·신라·고정민예사만 명맥 유지
울산시 1호 무형문화재 임원중 장인
허균 장인의 ‘오동상감장도’ 유명
장인들 사망·부상으로 맥 끊길 위기

울산의 달천산은 예로부터 철의 산지로 유명했고, 조선시대 군사기지인 병영에는 야장들이 모여 살며 그 철로 물건을 만들어 왔다. 대원군 시대에 병영이 폐영되면서 무기를 만들던 장인들은 숟가락과 밥그릇, 담뱃대와 은장도를 만들며 생계를 유지했다.

일제강점기 초기까지도 병영에는 72곳의 칼 공방에 350여 명의 장인이 있었다. 그러나 1980년대에 이르러서는 이미 서너 명만이 남아 간간이 들어오는 주문에 맞춰 겨우 명맥을 유지할 뿐이라 했다.

▲ 울산무형문화재 임원중 장인.

한참 은장도가 만들어지던 시절의 풍경에 대해 당시 아직 어렸던 임동훈 전수조교(1968년생)와 장경천(1961년생) 전수자는 다음과 같이 떠올린다.

“어릴 때 풍경은 아버지 따라가는 집에선 전부 다 망치질 소리가 났어요. 지금 병영 동네가 어디냐면요. 병영초등학교 앞쪽으로 그 동네를 옛날 어른들은 까지막골이라고 해요. 까지막골. 왜 그게 까지막골이냐면 거기 백정촌이였어요. 짐승 잡고 이러니까 애들보고 가지마라 가지마라 이런 게 까지막골로 바뀌었다는 거예요.”(임동훈 전수조교, 1968년생)

▲ 오동상감장도를 본격적으로 만든 허균 장인.

“(일간이) 아주 작았지. 한 평 반? 굉장히 열악했어요. 불도 옛날에 전구 30촉 있잖아요? 그거 얼마나 어둡노? 그걸 키고 했으니까. 전기세 아낀다고.

▲ 무형문화재 장추남 장인의 형인 장정환 장인.

이기 망치 소리가 있잖아요. 그때는 진짜 자장가처럼 들릴 그럴 때거든. TV가 있나. 전설 따라 삼천린가 그거 끝날 때까지 일을 하거든요? 새벽 일찍 시작해가지고 보통 새벽 5시부터 일 시작할걸? 그래가지고 밤 10시까지 17시간, 20시간 가까이 했었어요.”(장경천 전수자)

1960년대 이후 울산 병영의 은장도는 임원중 장인이 세운 고려민예사, 허균 장인이 세운 신라민예사 그리고 장추남 장인과 그 형님 장정환 장인이 세운 고정민예사, 이렇게 세 곳에서 맥을 이어갔다. 우연처럼 임원중·허균·장추남 장인은 모두 1930년생 동갑내기로 당시 병영의 장도 공예를 대표하는 인물들이었다.

▲ 병영의 장도.

이들은 수십 년 간 두 평 남짓한 좁은 공간, 그것도 적당히 벽돌을 쌓아 올린 화덕과 통나무를 통째로 썰어 만든 통배기가 자리를 차지하고, 쇳조각이 어수선하게 흩어진 채 여기저기 자잘한 연장들이 널려 있는 공방에 틀어 박혀 장도와 담뱃대를 만들어왔다.

임원중 장인은 1997년 울산시 제1호 무형문화재에 지정된 울산 최초의 장도장이다. 2004년 그가 작고한 이후 아들 임동훈 전수조교가 뒤를 잇고 있다. 임원중 장인의 사촌들인 임인출·임정출·임차출 3형제 또한 모두 뛰어난 장도와 담뱃대 장인들이었다.

▲ 병영의 담뱃대와 장도.

그중 임차출 장인은 진주로 삶의 터전을 옮기고 1987년 경상남도 무형문화재 제10호 장도장에 지정되었으며, 현재는 그의 아들 임장식 장인이 뒤를 잇고 있다.

허균 장인은 울산 은장도가 자랑하는 오동상감장도를 본격적으로 만든 사람이라 한다. 원래 오동 장식은 담뱃대에 주로 새겨 넣었는데 허균 장인이 태극, 학 등 다양한 문양의 오동을 장도에 넣었다고 한다. 그가 58세에 작고한 이래 아들 허명이 공방을 이어 받아 은장도를 만들었는데, 현재 허명 장인은 장도 만드는 일을 그만 둔 상태이다.

▲ 장추남 장인이 만든 오동상감장도.

마지막으로 현 무형문화재 장추남 장인이 형님 장정환 장인과 함께 은장도와 담뱃대를 만들어 왔고, 형님이 돌아가신 지금은 아들 정경천 전수자와 함께 공방을 운영하고 있다.

병영의 은장도는 오동상감장도로 유명하다. 이는 성인의 삭힌 오줌으로 만든 까만 빛깔의 구리(오동)를 은장도에 상감하여 만든 것이다. 하얀 은 바탕에 태극이나 꽃무늬 등의 문양을 새기고 거기에 새까만 오동을 박아 넣어 화려하게 꾸민 것이다. 오늘날에도 병영의 장도는 여전히 이 기법을 지키고 있다.

▲ 허균 장인의 아들 허명 장인이 만든 장도.

‘장도’하면 대부분이 화려한 은장도를 떠올리는데 사실 장도는 나무, 동물의 뼈, 상아, 대모, 옥 등 다양한 재료로 만든다. 그중에서도 오랜 기간 서민들의 삶과 함께한 것은 목장도이다. 목장도를 만드는 데는 오래된 감나무 심재에 검은 줄무늬가 들어간 흑시(먹감나무)와 벼락 맞은 대추나무를 최상급으로 친다. 장추남 장인 또한 목장도를 가장 좋아한다고 한다.

“은장도보다 목장도가 오히려 실용적이고 좋아요. 이건(은장도) 보기만 좋지 사치품밖에 더 됩니까? (목장도는)농사일 하다가나, 일상생활에 칼이 필요할 때 사용하고 그랬잖아요. 손톱도 깎고. 옛날에 손톱깎이 나오기 전에. 담금질을 잘 하면 면도도 하고, 용도가 그래 다양했어요.”

▲ 노경희 전문기자·울산대 국어국문학부 교수

본래부터 장도는 양반 부녀자들의 장식품만이 아닌 일반 백성들에 이르기까지 누구나 평소 흔히 쓰던 물건이었다. 다만 은이나 백동과 같이 귀한 것은 양반들이나 가질 수 있었고, 서민들은 나무로 만든 소박한 장도를 사용했다. 아름답기로는 화려한 장식과 조각으로 꾸민 은장도가 먼저 눈에 들어오지만, 오래 편하게 쓰기에는 목장도가 좋다고 한다.

오랜 시간 병영의 장인들은 울산 장도의 맥을 이어 왔다. 병영의 장도는 그저 조선시대 공인들의 손에서 그친 것이 아니라 일제강점기, 한국전쟁을 거치면서도 면면히 지속되어 온 울산의 자랑스러운 문화유산이다. 그러나 지금에 이르러서는 장인들의 사망과 부상 등으로 맥이 끊길 위기에 처해 있다. 이제 그 자산이 얼마나 귀한 줄을 깨닫고 그것을 지켜 갈 방법을 모색하는 것이 울산의 당면한 과제다.

글=노경희 전문기자·울산대 국어국문학부 교수 사진=울산시 제공 / 표제=서예가 김중엽

 

저작권자 © 경상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