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극히 개인적이어야 할 죽음의례가통계숫자의 하나로 전락된 시대 도래죽음의 존재 인식하며 현재를 즐기길

▲ 김상곤 전 울산시감사관

사람은 누구나 살아가면서 자신의 죽음에 대해서 생각한다. 때로는 친구들과의 대화에서 좀 더 구체적인 죽음의 모습을 화제로 삼기도 한다. 그러나 대부분 깊은 성찰이기 보다는 지나가는 이야기 정도의 가벼운 수준이다. 어느 정도 나이가 든 사람들도 죽음에 대해서는 농담으로 자신의 느낌을 대신한다. “지금 죽어도 호상이다.” 흔히 듣는 이 농담 속에는 노년기에 접어든 자신의 신체적인 상태에 대한 아쉬움과 더불어 이 사회에서 자신의 죽음이 차지하고 있는 의미와 무게의 가벼움에 대한 안타까움이 함께 포함되어 있다. 또 한편으로는 자신의 죽음은 아직 먼 훗날의 이야기일 뿐만 아니라 이 땅위에서의 삶이 절대 쉽게 끝나지 않으리라는 짙은 바람이 내포되어 있다. 독일의 대문호 헤르만 헤세도 노년에 이르러 죽음을 관조하면서 이렇게 읊조렸다고 한다. ‘따뜻한 벽난로 앞에서 우리 늙은이들에게 좋은 붉은 포도주를 마시면서 마지막으로 평온한 죽음을 맞이한다면 - 그러나 나중에, 아직 오늘은 아니다!’

이렇듯 일상 속에서 매순간 마주하는 죽음이지만 가능한 멀리 치워두고 감추고 싶어 하는 것이 인간의 속성이다. 아직도 우리 주위에는 숫자 4를 층수 표시로 쓰지 않는 아파트가 많이 있다. 글자나 소리도 죽음과 관계되는 상상을 일으키는 것은 피하고 싶은 것이다. 평소에 스스로 지식인이라고 자부하는 사람들도 이 문제에서는 신화적인 사고 수준을 넘어서지 못한다. 자녀의 혼사를 앞 둔 대부분의 부모들은 가까운 친척이 상을 당해도 문상을 가지 않는다. 왜 그러느냐고 묻는다면 아마 명확하게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냥 죽음은 부정적인 것이고 나쁜 것이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그래서 근처에 가는 것도 피해야 하는 대상으로 취급한다. 그만큼 삶과 죽음의 거리는 멀고 그만큼 삶은 더 아깝고 소중한 것이 된다. 그러다 보니 죽은 사람의 혼령일지라도 산자와 같이 대우하려 한다. 살아있는 사람이 먹는 밥을 육신이 사라진 영혼도 먹는다고 믿는 것이다. 제사를 지내면서 정성을 다하여 음식을 장만하는 이유다.

인간의 존재 형식 중에서 가장 개인적인 성격을 띠는 것이 죽음이라고 한다. 우리는 더불어 생활하고 함께 문화를 창조해 내지만 죽음은 철저히 혼자서 겪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죽음을 갈무리하는 과정도 엄숙한 절차와 의식을 통해 이루어진다. 장례의 진지함과 엄숙함은 어느 문화권이라고 해도 다르지 않다. 그러나 지극히 개인적이어야 할 죽음이 공적인 통계숫자 속의 하나로 취급되는 시대가 되었다. 심각한 부주의나 커다란 사고도 없이 몇 달 사이에 20만 명 이상이 죽었고 또 그 보다 더 많은 숫자의 죽음이 예정되어 있다고 방송에서는 연일 보도하고 있다. 바이러스에 감염된 300만 명 중의 일정 비율은 죽을 운명이라고 한다.

뿐만 아니라 각 나라마다의 죽음도 매일 매일 숫자로 표시되어 중계되고 있다. 또 그 주검들은 사후 24시간 이내에 가족이 아니라 공적인 시스템에 의해서 태워지고 묻혀 지고 있다. 심지어 죽은 자들을 예를 갖추어 갈무리 하는 것조차 어려운 지경이 되었다. 거리에 주검이 뒹굴고 전장에서나 있을 집단 매장이 전 세계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죽음이 개인적인 의미를 가지지 못하고 집단적인 관리대상으로 전락하게 되다보니 죽음의 순간에 가족들을 볼 수도 없고 죽어서는 가족과의 작은 작별 의례도 치르지 못한다. 이런 사태는 이름 모를 바이러스가 살아 있는 한 빈번하게 반복될 것이라고 전문가들은 예견한다. 이제 우리는 죽음의 의례를 살아 있는 동안 미리 준비하고 치러야 할 것 같다. 일상 속에서 가족들과 매일 작별하는 연습을 하고 소중한 이들의 손을 마지막인 것처럼 잡아야 한다. 죽음을 은폐하고 감추어야 할 시대는 지난 것 같다. 일상 속에서 죽음의 존재를 항상 인식하고 함께 살아가다 보면 지금 여기에 아직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이 커다란 축복으로 다가올 지도 모른다. 바이러스가 인간에게 새로운 삶의 양식을 가르쳐 주고 있다.

김상곤 전 울산시감사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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