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문찬 울산대학교 의과대학 교수·가정의학

꽃 진 자리마다 잎들로 가득하고, 떡갈나무 이파리는 층층이 하늘을 가린다. 산과 들, 땅과 바다는 어느새 한 몸으로 봄바람에 너울진다. 산과 들, 땅과 바다가 한 몸이 되는 것은 계곡물에 녹아든 신록의 빛깔들이 들과 바다에 닿아 이들이 물리적으로 하나가 되기 때문인데, 이때부터 5월의 풍경은 바람이 지배한다. 바람에 너울진 신록의 물결이 쉴 새 없이 밀려오는 희망찬 5월이다.

역동적으로 흐르는 의식은 다양한 수준의 서비스를 제공한다. 의식은 가장 낮은 수준에서는 능동적인 바라보기 및 탐색하기를 제공하고 이것을 통해 임박한 사건을 예감한다. 이것은 언어가 생성되기 전에 형성되는 의식이며 생존의 필수조건이다. 반면 언어에 의해 만들어 지는 의식은 현재와 과거의 지각 및 기억의 상호작용을 허용하며, 늘 능동적이며 선택적이다. 나의 선택에 정보를 제공하며 나의 지각에 영향력을 행사한다. 그리하여 모든 감정과 의미는 나 자신만의 독특한 것이 된다(올리버 색스, 의식의 강. 알마 2019). 결국 내가 바라보는 세상은 나의 의식과 언어에 의해 형성된 것(幻)이다.

알았든 몰랐든, 모든 지각과 장면들은 우리 자신에 의해 형성된다. 의식의 밑바탕에 깔린 지각의 순간은 단순한 물리적 순간이 아니라, 본질적으로 우리의 자아를 구성하는 개인적인 순간들이다. 그러므로 내가 바라보는 5월은 여름을 향해가는 단순한 5월이 아니라 나만의 개성과 정체성이 가미된 내 안의 5월이고 나만의 5월이며, 우리가 포착해야 될 또 하나의 의식이다.

‘어린애의 웃음 같이 깨끗하고 명랑한 5월의 하늘, 나날이 푸르러 가는 이 산 저 산, 나날이 새로운 경이(驚異)를 가져오는 이 언덕 저 언덕, 그리고 하늘을 달리고 녹음을 스쳐오는 맑고 향기로운 바람’(이양하 ‘신록예찬’).

신록(新綠)의 5월이다. 희망이 절망 뒤의 기쁨이라면, 신록은 절망 뒤의 깨달음이다. 꽃 진 자리마다 돋아난 작은 잎들이 태산 같은 물결을 이루어 그 물결이 마음 속 깊은 절망의 경계를 허물 때, 신록은 희망의 바다가 되고 너울진 희망의 물결을 따라 내 안의 5월은 시작된다. 5월의 바닷가에서 절망과 싸워본 본 사람들은 안다. 신록은 결국 내 의식의 소산이었고, 너울진 신록 앞에 절망은 짧았음을. 김문찬 울산대학교 의과대학 교수·가정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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