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3)

▲ 2천년 전 고대 로마시대의 도시유적인 폼페이. 건물들이 온전한 모습을 갖추지는 못해도 광장의 형태는 뚜렷하다. 당시의 모습 그대로 복원한다고 해도 오늘날의 삶을 받아주기에 결코 어색함이 없을 것이다.

도시 통째로 화산재에 묻힌 폼페이
고대 로마의 일상 고스란히 간직해
신전·광장·도로 등 도시기반시설은
2천년의 간극을 훌쩍 뛰어넘을만큼
오늘날의 삶을 담아도 어색함 없어

이탈리아 남부 나폴리 만 연안에 소재하는 폼페이. 2천년 전 고대 로마시대의 도시유적이다. 서기 79년 이 아름다운 항구도시를 일순간에 덮친 화산대폭발은 도시 하나를 화산재 속에 통째로 묻어버렸다. 두터운 화산재를 걷어내면서 나타나는 도시의 모습에 세계는 경악했다. 고대 로마의 일상이 고스란히 담긴 도시의 모습과 대참사의 비극적 순간을 이보다 더 생생하게 보존한 현장은 일찍이 없었기 때문이다.

2천년의 시간을 거슬러 로마의 일상과 마주할 생각에 가슴이 두근거린다. 사실은 이 도시의 역사가 그보다 훨씬 오래된 그리스 도시로부터 시작한다는 점이 더욱 신비스럽다. 로마시대에 재개발이 이루어진 흔적은 지도에서 발견할 수 있다. 남서쪽 구역으로부터 도시는 여러 단계에 걸쳐 확장되었고, 로마에 편입된 후 북동쪽으로 대대적인 개발이 이루어졌다. 직교하는 직선도로로 격자형 가로망이 형성된 것을 보면 계획적으로 도시가 확장된 것이 분명하다.

성벽 밑에 터널처럼 뚫린 성문을 지나 잠깐 걸으면 폼페이 광장에 도달한다. 시원하게 개방된 마당에 빛이 쏟아진다. 그 빛에 2천년 전의 로마 도시와 광장이 생생하게 드러난다. 비록 건물들이 온전한 모습을 갖추지는 못해도 광장의 형태는 뚜렷하다. 삼면이 2층높이의 열주랑으로 둘러싸 반듯한 직사각형 모습을 갖추었다. 주변건물들의 축과 열주랑의 축이 약간씩 어긋나는 것은 나중에 열주랑이 추가되었음을 암시한다.

광장의 북쪽 끝에 베수비우스 화산을 배경으로 주피터 신전이 높은 기단 위에서 광장을 내려다보고 있다. 신전과 광장의 축이 산을 향하도록 일부러 맞춘 듯하다. 광장이라는 장소가 신전을 거처 베수비오 산으로 올라 하늘세계로 이어진다고 믿었을 것이다. 물론 주피터 신전만이 아니라 아폴로나 가정의 수호신 등 여러 신전들도 광장을 에워싸고 있다. 신들이 지켜주는 도시의 중심인 셈이다.

맞은편에는 시의회실(curia)과 재판정으로 사용하던 바실리카(basilica)가 자리한다. 집회와 토론, 재판 등이 열리는 공간이니 행정과 정치의 중심이기도 하다. 주피터 신전 옆으로는 대규모의 시장이 들어섰고, 동쪽 편에는 거대한 의류상점도 있었다. 건물의 위치나 규모, 형식으로 보아 오늘날 고급백화점이나 명품 패션 의류점이었을 것이다. 두말할 나위가 없이 광장은 특히 남자들에게 도시생활의 중심이었다.

광장에서 대로를 따라 걸으면 주택가로 연결된다. 도로나 교량 등 도시기반시설을 만드는 기술과 수준에서 로마인을 따라갈 민족은 없다. 마차가 다닐 수 있는 널찍한 도로는 큼직한 돌로 아귀를 잘 맞추어 깨끗하게 포장했다. 도로 중앙부를 불룩하게 하여 양쪽 도랑으로 흘러가게 하는 기법은 현대까지 사용되는 배수법이다. 도로의 하수시설은 주택이나 공중화장실과 목욕탕 등의 하수도와 연결하여 위생적인 하수시스템을 만들었다.

단순히 공학기술만 우수한 것이 아니었다. 마차길 한쪽에 단을 높여 보도를 만들어 마차 길과 분리함으로써 보행자들의 안전을 도모했다. 심지어 비가 오면 신발이 젖지 않도록 징검다리 형 횡단보도까지 마련했다. 이야말로 쾌적한 환경조성을 추구하는 어메니티(amenity) 계획의 표본이 아닌가.

로마인만큼 목욕을 즐기는 사람도 드물다. 대중목욕탕(theremae)은 휴식과 운동과 사교의 공간이었다. 증기실 욕조와 열탕, 온탕, 냉탕 욕조는 물론이거니와 수영장과 운동실, 휴게실, 독서실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시설이 구비되었다. 오늘날 고급 헬스클럽에 해당하는 시설을 모두 갖춘 셈이다. 공간이나 시설도 웬만한 귀족주택보다 더 고급스러운 수준이다. 대리석 바닥과 유채색 프레스코화를 그린 벽, 수많은 조각상 장식과 볼트 천장의 유려한 부조들은 르네상스 성당의 내부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더욱 놀라운 것은 이 내부공간에 난방을 위한 온돌이 시설되었다는 점이다. 건물 밖에서 물을 데워 수증기가 바닥 밑과 벽체를 통과하면서 난방하는 방식이다. 온돌에 관한 한 우리 민족의 고유한 난방방식이라고 굳게 믿어온 얄팍한 지식이 송두리째 벗겨지는 심정이라고나 할까. 부끄럽기도 하고 놀랍기도 할 뿐이다.

▲ 강영환 울산대학교 명예교수

폼페이는 2천년이라는 시간의 간극을 극적으로 대비시킨다. 하지만 이 도시와 주택의 유적은 그리 오래되지도 생경해 보이지도 않는다. 편리하고 위생적인 기반시설, 활기찬 상업가로, 여유로운 여가생활, 안락한 주거환경 등등. 당시의 모습 그대로 복원한다고 해도 오늘날의 삶을 받아주기에 결코 어색함이 없을 것이다. 아니 오늘날 이만한 기반시설과 환경, 도시경관을 갖춘 도시도 그리 흔치 않다. 무려 2천년 동안 인류는 도시와 주거 환경에서 도대체 무엇을 발전시킨 것일까?

하지만 풍요롭던 이 도시의 역사는 끔직한 재앙으로 한 순간에 사라져 버렸다. 마치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처럼 신의 저주를 받았던 것인가. 아니 그것은 예고된 재난이었다. 화산 대폭발이 있기 전부터 이미 수차례의 예고가 있었고, 십여 년 전에는 지진으로 큰 피해를 입어 대대적인 복구가 이루어지기도 했었다. 천재지변은 인간이 숙명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하늘의 뜻인가? 아니면 살 곳을 가려야 하는 지혜를 무시했던 욕망의 결과인가? 도시든 건축이든 어떻게 지을까를 생각하기 전에 어디에 지을까를 고민하는 것이 우선이다. 2천년이 지난 오늘도 폼페이의 역사는 교훈이 되지 못한 채 장소를 가리지 않는 개발이 대재앙을 예고하고 있다. 강영환 울산대학교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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