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문찬 울산대학교 의과대학 교수·가정의학

어제(5월21일)는 부부의 날이었다. 둘이 하나 되길 바라는 부부일심동체의 염원이 담긴 날이다. 굳건한 사랑의 맹세 위에 부부의 연을 맺지만, 사랑의 이타적인 측면들은 인간이 지닌 이기적 본성 앞에 하나 둘 무릎을 꿇는다. 결혼한 지 사흘이 못 가 섭섭함이 생겨나는 이유다. <남한산성>의 작가 김훈은 ‘결혼이란 오래 같이 살아서 생애를 이루는 것인데, 힘들 때도 꾸역꾸역 살아 내려면 사랑보다도 연민이 더 소중한 동력이 된다’고 했다. 연민은 서로를 측은히 여기는 마음이다.

‘백발의 노부부는 꼭 같았다. 서로를 향한 눈빛은 연민으로 가득했고, 주름진 얼굴은 마치 똑같은 각시탈을 쓴 것 같았다’(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 다큐멘터리 독립영화 2014). 내면은 외면을 결정한다. 지나온 세월의 흔적만으로 부부가 그렇게 닮을 수는 없다. 노부부가 하나처럼 닮은 것은 서로를 가엾이 여기는 측은지심(惻隱之心)의 내면이 일치했기 때문이다. 날카로운 선들이 곡선으로 풀어지는 것은 내면의 공간을 넓히기 위해서다. 늘어난 내면의 넓이만큼 외면의 주름도 늘어난다. 주름을 따라 시련에 찬 삶을 살아갈 때 부부는 저절로 닮을 것이지만, 영상은 처음부터 끝까지 내 앞에 선 ‘네가 바로 나’였음을 가르치고 있었다. 나는 그것을 끝까지 알아차리지 못했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너와 나’의 구분을 지우며 일심동체의 지향점을 완성해 가는 것은 황혼녘에 찾아온 노혼(老渾) 때문이 아니었다. 의식은 명료했다. 명료한 의식을 바탕으로 ‘너와 나’의 구분을 지우는 것은 노부부의 높고도 높은 삶의 경지일 것이지만, 부부가 닮는 형이하학의 과학적 이유는 다음과 같다.

우리 몸에는 수많은 미생물이 함께 살아가고 있다. 이들이 지닌 유전자 수는 인간의 100배 이상이다. 이들의 유전자는 인간유전자가 만들 수 없는 것을 만들어 공급한다. 미생물을 공유하면 동일한 유전자를 공유하는 것이 된다. 결국 인간의 차이는 각자의 몸에 지닌 미생물의 차이인 것이다(Nature 2012).

부부가 닮는 것은 함께 부대끼며 미생물을 공유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부부가 일심동체의 지향점을 완성해 가는 것은 과학적으로 증명하기 어려운 형이상학의 영역임이 분명하다. 김문찬 울산대학교 의과대학 교수·가정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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