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목판 판각 장인 한초 - 부처와 보살의 아름다움 나무에 새기다

▲ 작업에 몰두하고 있는 한초 장인.

‘울산의 쟁이들’은 ‘세상이 알아주지 않아도 그저 담담하게 그 길을 걸어가는 사람들’에 대한 기록이다. 울산을 기반으로 오랜 기간 전통문화 분야에 몰두하며 최고의 열정과 기량을 보여준 사람들을 인터뷰하고 그 생애와 기예를 소개한다.

오옥진 문하서 목판 본격 제작
운흥사 각승 연희 뜻이어 판각
섬세한 표현에 목판 인출도 달라
탁본으로 한초고판화 장르 개척
보석 장식작업 도전의식 불러와
불교미술대회 예술성 인증 받아

울산 울주군의 천성산 자락에 자리하던, 지금은 부도와 초석 몇 점만이 그 존재를 증명하는 ‘운흥사(雲興寺)’라는 절이 17세기 후반 조선의 대표적인 불경 출판 장소였음을 아는 이들은 많지 않다. 그러나 이 절은 당시 해인사에 버금갈 정도의 작업을 하였고 그 증거로 현재 통도사의 성보박물관에는 운흥사에서 간행한 불서 16종의 판목 673점이 보관되어 있다.

이 사업은 울산 출신의 승려들인 연희(演熙)와 학훈(學熏)의 주도로 이루어졌다. 어머니에 대한 효심에서 불서 제작을 시작한 연희 스님은 나무를 구해 다듬고 새기는 일과, 인출, 장황 등의 기술적인 부분을 맡았고, 학훈 스님은 작업 비용 마련과 잡무 처리 등의 일을 맡아 연희 스님을 지원하였다. 당시 사람들은 이들에 대해 ‘같은 마음과 같은 뜻을 지닌 사람들(同心同志人)’이라 일컫기도 하였다. 연희 스님은 특히 조선에 몇 안 되는, 책머리의 삽화를 판각하는 ‘장두(粧頭)각수’로서 변상도(變相圖) 판화를 여러 장 남기고 있다. 변상도는 곧 불교 경전의 교리, 부처님의 일생과 불교 설화 등을 그림으로 표현한 것이다.

▲ 석물과 제30회 대한민국불교미술대전 수상작 ‘석가삼불도’(맨 위사진).

한초(1953년생·韓艸) 장인은 각승 연희의 뜻을 받들며 변상도 판각에 일생을 바치고 있는 사람이다. 2018년 본명 ‘한병옥’을 ‘한초’로 개명했다. 40대 초반 삶에 고단함을 느끼면서 고향 경주로 돌아온 장인은 포항의 어느 사찰 스님에게 서각을 배우며 전통 고판화에 흥미를 갖게 되었다. 이후 다시 서울로 올라 가 1999년 국가무형문화재 제106호 각자장 철재(鐵齋) 오옥진(1935~2014, 1996년 지정)의 문하에 입문하면서 본격적인 목판 제작의 길에 들어섰다.

▲ 운흥사터의 부도

몇 년에 이르는 각고의 수련 끝에 2007년 이수자로 인정받았고, 오옥진, 김각한 장인들이 이끄는 경복궁, 수원화성, 낙산사, 광화문 등의 현판과 주련 복원 작업에 참여하였다. 김각한 장인은 오옥진 장인의 제자로서 제2대 각자장이다.(2013년 지정)

한초 장인은 2015년 3월 오랜 서울 생활을 정리하고 울산에 터를 잡았다. 이후 울산 운흥사의 불서 간행과 각승 연희의 존재를 알았고 곧 변상도 판각의 세계에 빠지게 된다. 변상도는 섬세한 선과 화려한 장식들, 복잡한 구도로 인해 나무에 새기기 쉽지 않았지만 한편으로 이는 장인에게 무한한 도전 의식을 불러 일으키는 작업이었다.

“저는 사람들이 쉽게 할 수 없는 복잡한 것을 좋아합니다. 부처님은 단순합니다. 경지에 오른 분들은 복잡할 일이 없습니다. 보살들은 인간과 친하기 때문에 치장을 많이 해서 화려합니다. 구슬 같은 보석 장식이 많아 섬세하고 어렵습니다. 창칼로 나무에다 동그라미를 파내는 작업은 아주 힘듭니다. 아주 작은 원들인데 그걸 하느냐 못하느냐에 따라 작품이 완전히 달라집니다. 이 작업은 기술이고 기능입니다. 그 기능이 궁극의 경지에 올라가야 예술이 됩니다.”

그는 가장 작고 세밀한 것들이 가장 중요한 요소들이라고 누차 강조한다. 화면 가득 수많은 사람들을 그릴 때도 한명 한명이 모두 자기만의 표정을 갖고 있어야 한다.

“얼굴의 세부, 눈ㆍ코ㆍ입, 손가락과 발가락 마디마디, 이게 핵심입니다. 표정이 없으면 얼굴이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얼굴에 입술 같은 것들이 제대로 그려져야만 인물이 살아납니다. 옆으로 서 있을 때는 귀가 살아야 하고, 이마의 점, 눈썹, 눈, 미소, 이 모든 것들이 살아 있어야 해요. 얼굴에는 놀라는 표정도 있고 웃는 표정도 있습니다. 이를 표현하려면 선들이 아주 가늘어야 합니다.”

보통의 경우 목판은 책을 만들기 위한 중간 과정일 뿐이다. 그러나 한초 장인에게는 목판 자체가 예술 감상의 대상이자 작업의 목표물이다. 이에 그는 먹칠 때문에 목판의 각선이 보이지 않게 되는 일반적인 인출의 방식이 아닌, 목판 위에 종이를 얹어 두드리면서 찍는 탁인(건탁)의 방식을 고수한다. 이로써 ‘목판’과 ‘탁본’을 동시에 감상할 수 있는 ‘한초고판화’라는 독보적인 장르를 개척한 것이다.

▲ 글=노경희 전문기자

머리에는 아미타불을 이고 있고 직경 1㎜도 채 되지 않는 자잘한 구슬들로 온 몸을 장식한 그의 관세음보살 판각을 보고 있노라면 목판 자체가 예술품이라는 말에 저절로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두 손을 가지런히 모으고 우러러 봐야 할 것 같은 아름다운 보살의 모습 속에서 아름다움과 성스러움은 서로 통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한초 장인은 2019년 10월 국내 최고 권위의 불교 미술 대회인 대한민국불교미술대전(제30회)에서 ‘석가삼불도 목판과 탁본’으로 ‘대상 없는 최우수상(공예 부분)’을 수상함으로써 그 기량과 예술성을 인정받았다. 더 이상 올라갈 곳도 없을 것 같은 눈부신 기예를 지니고 있으면서도 그는 여전히 새롭고 남들이 도달하지 못한 경지에 이르기를 꿈꾼다. 수천 년 전 선사시대 사람들의 삶이 바위에 새겨져 있는 암각화의 고장에서, 수백 년 전 부처님의 마음을 목판에 그렸던 연희 스님의 뜻을 이어 받아, 한초 장인은 오늘도 부처와 보살의 아름다움을 새기기 위해 나무를 깎고 다듬는다.

“제가 이쪽에 들어선 건, 누구도 만들어 본 적이 없는, 아무도 하려고 생각하지 않은 작업이기 때문입니다. 독보적이다, 나만이 할 수 있다, 이렇게 차별화 되는 것, 그것이 저에게는 예술입니다.”

글=노경희 전문기자· 울산대 국어국문학부 교수 사진=울산시·한초 장인 제공 표제=서예가 김중엽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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