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수종 울산시 동구의회 의원

울산 동구 방어진은 근현대사 속에서 흥망성쇠를 반복했다. 시작은 일제강점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근해에 해산물이 풍부했고, 천혜의 항구 조건을 갖춰 일본은 방어진을 어업의 전진기지로 삼았다. 1910년 전후 일본인 어민의 집단 이주가 이뤄졌고, 외지의 조선인들도 돈을 벌기 위해 방어진으로 몰려들었다. 1890년대 말 160명에 불과한 인구는 1921년경에는 조선인과 일본인을 합쳐 5000여명에 달했다. 전국 총 생산의 10%라는 엄청난 어획고를 올렸는데, 당시 ‘방어진에는 개도 지폐를 물고 다닌다’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하지만 1945년 해방이 되면서 쇠퇴기가 찾아왔다. 일본인들이 어선과 각종 어로도구를 모두 챙겨 철수하면서 갑작스런 몰락의 길을 걷게 됐다.

방어진은 이후 포경업을 통해 침제기를 이겨냈다. 1948년 11월 ‘동양포경회사’가 설립되면서 고래잡이가 본격화 됐다. 고래잡이의 중심항이었던 장생포 포경산업보다는 규모가 작았지만 한때는 앞선다는 기록도 있을 정도로 포경업이 활기를 띄었다.

포경업이 시들해질 무렵에는 조선업이 어업의 자리를 대신했다. 1972년 현대중공업 전신인 현대조선이 들어선 뒤 방어진은 조선업 중심지로 자리잡았다. 한 때는 선주 가족까지 2000명이 넘는 외국인이 방어진 거리를 채웠고, 전국 각지에서 일자리를 찾아 방어진으로 몰려들어 사상 최대의 부흥을 누렸다.

최근에는 영원할 것만 같던 부흥기는 가고 다시 쇠퇴기가 찾아왔다. 몇 년간 조선업 침체가 계속돼 전반적인 경제가 크게 위축됐고, 올해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까지 겹치면서 방어진의 표정은 어둡기만 하다.

이에 동구는 방어진의 새로운 도약을 위해 관광산업 육성에 노력하고 있다. 지난 2016년부터 ‘방어진항 재생을 통한 지역 활성화 원점지역 재창조사업’이라는 도시재생사업이 진행 중이다. 올해 마무리되는 이 사업은 동구의 원도심이자 조선업 태동지인 방어진항의 도시기능을 되살리는 동시에 주민들이 살기 좋은 지역을 조성하는데 역점을 두고 있다. 최근 방어진항 해양수산복합공간 조성사업도 오는 12월 준공을 목표로 공사에 들어갔다. 방어진활어센터 앞에 연면적 1300㎡, 지상 1층 규모로 들어서는 해양수산복합공간에는 기존 방어진활어회센터 상인들이 이전하며, 상업시설과 별도로 상인들을 위한 교육 및 방어진항을 홍보하는 공간이 마련된다.

방어진이 관광지로 변신하기 위해서는 현재 진행 중인 사업을 제대로 마무리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관광산업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랜드마크 조성을 고민해야 한다. 파리의 에펠탑과 루브르박물관, 런던의 빅벤과 런던아이, 시드니의 오페라하우스와 하버브릿지, 두바이의 버즈칼리파와 인공섬, 도쿄의 롯본기힐스와 디즈니랜드 등 도시를 대표하는 랜드마크는 관광객이 여행을 가고자하는 이유가 되기 때문이다.

방어진의 랜드마크로 ‘조선해양 박물관’이 적합하다는 의견이 많다. 방어진에는 1929년 우리나라 최초의 조선소인 ‘방어진철공조선소’가 있었다. 1939년 200명 이상의 직공을 거느린 조선 최대의 조선소 중 하나로 성장하면서 방어진 지역 경제의 한 축을 담당했다. 방어진철공조선은 1960년 청구조선공업사, 1999년 INP중공업, 2007년 세광중공업 등으로 변경되며 명맥을 유지했으나 2012년 파산했다. 비록 시작이 일제강점기 시대이긴 하지만 방어진철공조선소는 오늘날 현대중공업이라는 세계 최고의 조선소가 탄생하는 밑거름이 됐다.

이처럼 방어진은 대한민국 조선소가 시작된 곳이자 현재 세계 최고의 조선소를 품고 있는 곳이다. 이 역사는 ‘조선해양 박물관’을 만들 수 있는 충분한 재료다. 또 방어진철공조선소에서 목선을 만들던 방어진 현지인들이 아직 생존해 있고, 엔진을 가공하고 배를 만들던 공구들도 남아 있다. 이와 같은 재료들을 의미 있게 잘 엮어 낸다면 방어진의 부활 뿐 아니라 관광도시로 변모하고자 하는 동구에도 큰 자산이 될 수 있다.

김수종 울산시 동구의회 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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