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문찬 울산대학교 의과대학 교수·가정의학

꽃 진 자리마다 열매가 맺었다. 꽃이 지는 것은 수정에 성공했기 때문인데, 사라진 봄꽃 화무십일홍의 허무를 달래는 것은 어린 열매들이다. 봄꽃의 마지막은 송화(松花)다. 봄의 끝자락을 따라 여름을 이끄는 바람이 불어오면, 송화는 이때를 기다려 한껏 부푼 몸을 수정의 바람(願)만으로 바람(風)에 날려 보낸다. 바람(願)만으로 사라지는 모든 것이 그러하듯 송화의 뒷모습도 처연하고 쓸쓸하다. 송화가 사라지면 벌써 여름의 시작이다.

시작은 설렘이다. 계절의 시작도 설렘이다. 설렘은 환희의 요동이다. 봄의 설렘이 양지쪽 언덕이라면, 여름의 설렘은 우듬지 잎들 우거진 햇살 그윽한 숲속이다. 꽃 진 자리마다 열매가 돋아나면 숲은 환희로 요동친다. 어린 새댁처럼 한껏 부푼 설렘으로 숲은 열매를 품고 키워낸다. 부지런히 빛들을 빨아들이고 필요한 물질의 합성도 늘린다. 두꺼워진 잎들로 녹음은 짙어지고 숲은 점점 깊어간다.

숲의 조화는 순전히 나무들의 상호의존과 소통을 통해서 생겨난다. 천적의 출현을 알리는 비상 시스템의 작동은 신속하고 고요하다. 숲속의 나무들은 종류에 상관없이 메시지와 공감을 주고받는다. 햇빛이 부족한 나무에게는 자신이 합성한 영양소를 나누어 주기도 한다. 숲을 하나로 연결시키는 것은 땅속 균사체(菌絲體·mycelium)의 미세한 섬유망인데, 그 방대한 신경망은 숲을 하나의 유기체로 만들어 준다(앤 드루얀, 코스모스: 가능한 세계들. 사이언스 북스 2020).

숲은 자체로 거대한 생명체다. 살아있는 것들이 함께 엉켜 공존할 때 숲은 어디서나 생겨날 것이지만, 품속의 생명체를 지키고 보호하는 모성까지 지녔다니 실로 놀라울 뿐이다. 어린 열매가 자라나는 여름 숲은 더 많은 물질을 합성한다. 사계의 숲이 저마다 특징이 있지만, 그 중에서도 여름 숲이 최고인 것은 이 때문이다. 숲의 천연물질은 신체 기능뿐만 아니라 인지기능의 회복에도 도움이 된다(2014.5, 미국 엑시터대학 연구팀). 숲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무한한 존재적 가치를 지니지만, 생명체에 미치는 기능적 차원의 가치는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다. 사철 숲과 어울려야 하지만 특히 여름에는 숲속이 제일이다. 숲은 거대한 생명체로 자신이 품은 모든 존재를 지키고 보호한다. 김문찬 울산대학교 의과대학 교수·가정의학

 

저작권자 © 경상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