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배혜숙 수필가

‘꿈이로다 꿈이로다 모두가 다 꿈이로다.’

오랜만에 찾아온 월남사지 삼층석탑 앞에서 망연자실하다. 동네 고샅길을 천천히 걸어가서 만났던 훤칠하게 잘 생긴 석탑이 아니라 너른 절터에 홀로 덩그러니 서 있다. 월남사지는 발굴조사를 끝내고 복원 정비 사업이 한창이다. 없어진 것을 말쑥하게 새 것으로 채우는 것이 복원이라면 있는 그대로를 잘 보존하는 것도 가치가 충분하기에 괜히 서운하다. 그래서 공초 오상순의 ‘꿈’을 되뇌어 본다.

돌담에 기댄 동백나무에서 툭툭 떨어지던 붉은 꽃의 흥취와 삼층석탑의 어우러짐이 좋아 자주 찾아 왔었다. 그런데 고려인을 닮은 마을 사람도 만날 수 없고 절터의 돌을 가져다 담을 만든 소박한 집들도 싹 다 사라졌다. 월남사지 삼층석탑이 그리운 것은 동네 가운데 자리한 부처의 집이었기 때문이다. 달빛 내리는 밤, 먼 길 떠났다 돌아오는 사내들을 고려시대의 석탑은 큰 키로 맞아주었다. 고된 일을 하던 여인들이 발뒤꿈치만 들면 탑의 지붕돌과 눈 맞춤을 했다. 수험생들은 집을 나서면 꼭 이 석탑 앞을 지나갔을 것이다. 부처님의 자비는 바로 그런 것이 아닐까.

 

마을은 없어졌지만 호남의 소금강인 월출산이 여전히 석탑의 훌륭한 배경이 되어 준다. 위풍당당한 바위산을 가장 편안하게 바라볼 수 있는 명당자리이기에 서운함을 달래본다. 보물 제 298호 월남사지 삼층석탑과 마주하면 발레리나처럼 발끝으로 서게 된다. 높이 7.3m, 늘씬한 탑은 정림사지 오층석탑을 닮아 우아한 자태를 뿜어내기 때문이다. 그렇게 발끝을 들고 한참을 있는데 서울에서 왔다는 남자가 탑을 빙글빙글 돌다 말을 붙인다. 별과 함께 탑을 찍으러 전국을 다닌다며 스마트 폰 속의 사진을 보여준다.

해가 뉘엿뉘엿 기울고 있다. 삼층석탑에 전해오는, 석공과 그 아내와의 사무치는 그리움에 대한 전설을 물끄러미 보고 있는 남자를 홀로 두고 절터를 나선다. 저 남자도 어둠이 내리면 탑과 함께 부질없는 꿈속을 헤매다 길을 찾을 것이다. 배혜숙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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