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④

▲ 아시시 성곽의 한 모퉁이에 자리한 성프란체스코 성당. 말 위에서 고개를 떨군 채 고뇌에 찬 모습을 하고 있는 프란체스코, 그는 학살과 약탈, 탐욕을 경험한 십자군 전쟁 이후 벌거벗은 채 집을 나서는 것으로 새로운 삶을 시작한다.
청빈한 삶 실천하려 했던 프란체스코

교황청의 성인화로 호화 성당에 묻혀

낙동강변의 소박한 명례성당 찾으면

묵직한 감동주는 진정한 성지와 마주

무소유 꿈꾼 성인의 유지 돌아보게 해

유럽에서 도시와 건축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기독교 역사에 대한 이해가 필수적이다. 특히 중세도시들은 대부분 기독교 역사나 인물과 관련돼 있게 마련이다. 이에 유서 깊은 도시나 건축은 특정한 성자를 기념하기 위한 성지이거나 순례지로서 의미를 갖는 경우가 많다. 이탈리아 중부에 소재하는 아시시 또한 성인 프란체스코(1182~1226년)를 빼고서는 설명하기 어렵다.

그는 교회권력의 부정과 부패를 비판하고 초대교회의 정신으로 돌아가자는 운동의 선구자로 알려진다. 그의 행적이 기록으로 남아있기는 해도 대부분 전설적인 서사로 묘사된 것뿐이다. 많은 이야기들이 후대에 첨삭, 분식되었는지 모른다. 하지만 그가 돈키호테처럼 그리스도 삶의 실천에 직설적으로 뛰어 들어간 것만은 분명하다. 청빈, 순종, 순명이라는 표제어는 그가 실천하려 했던 삶에 대한 유럽식 표현력의 한계이리라.

아시시(assisi)는 그가 태어나고 묻힌 곳이다. 야트막한 언덕위에 옹기종기 모여 있는 성곽도시, 이탈리아 중부지방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중세 성곽도시의 모습이다. 외관은 연한 핑크빛으로 화사하지만 규모는 위압적이다. 성문을 지나 언덕길을 오르면서 먼저 만나는 초기 고딕양식의 성당이 있다. 성녀 클라라에게 봉헌된 키아라 성당(Basilica of Santa Chiara)이다. 프란체스코의 가장 독실한 추종자였던 그녀의 모습답게 소박하고 단정하다. 성당의 광장에서 내려다보는 아시시와 움부리아 평원의 모습이 절경이다.

키아라 성당에서 횡으로 연결되는 가로를 따라 걸으면 중간에 프란체스코의 탄생지와 생가를 만날 수 있다. 부유한 상인이었던 아버지, 아들을 감싸고돌았던 어머니, 그리고 ‘엄친아’로 자랐던 청년기의 프란체스코를 역사적 현장으로 만난다. 그렇게 부유했다던 그의 생가는 허름한 건물만 남겨져 있을 뿐이다. 무엇이 그로 하여금 금수저를 내려놓고 속옷까지 홀딱 벗어 아버지께 돌려주게 했을까.

아시시 성곽의 한 모퉁이에 그의 유해가 안장된 성당이 소재한다. 성당 앞마당에는 말 위에서 고개를 떨군 채 고뇌에 찬 모습으로 돌아오는 기사상이 서있다. 십자군 전쟁에서 돌아오는 프란체스코의 모습일 것이다. 배타적이고 이기적인 신의 이름으로, 교황과 주교와 교회의 이름으로 저지른 학살과 약탈, 왕과 영주들과 기사들의 탐욕, 그 모든 것들이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얼마나 괴리되었는지를 비단 프란체스코만 목도했을까. 그리스도의 삶을 실천하기로 선택한 그는 벌거벗은 채 집을 나서는 것으로 새로운 삶을 시작한다.

절대청빈, 무소유, 근사한 용어지만 그것은 거지와 다름이 없는 삶이었다. 그의 생전에는 일정한 수도원도 없이 떠돌아다니며 걸식으로 연명했다. 순수하고 청빈한 삶을 실천하는 그의 행위를 세속 권력에 물든 교회가 곱게 보았을 리는 만무하다. 하지만 교회 개혁에 대한 요구와 맞물리며 폭발적인 대중적 지지를 받았고, 교황청은 그를 따르는 무리를 수도회로 공인함으로써 제도권 안으로 포섭하게 된다. 그는 죽은 지 2년 만에 성인의 반열에 올랐다.

교황들은 성인화의 중요한 수단으로 그의 유해를 모신 거룩한 성당건설에 재빨리 착수했다. 13세기부터 진행된 프로젝트는 거대한 아케이드형 하부를 성채처럼 쌓고 상부에는 초기 고딕양식의 거대한 성당을 세웠다. 교황성당으로 특권까지 부여했고, 15세기에는 진입부에 아케이드로 둘러싸인 방형의 광장을 갖추어 성스러운 순례지가 되었으니 그 위엄과 권위는 결국 교황에게 돌아간 것이 분명하다.

성당은 두 개의 층으로 구성되었으니 웬만한 성당의 두 배 규모다. 성당 안의 장식도 호화스럽기 짝이 없다. 조토(Giotto di Bondone 1267~1337)를 비롯한 중세 후기 화가들의 프레스코화들로 벽과 천장을 가득 채웠다. 조토는 르네상스 미술의 선구자답게 사실적인 묘사로 프란체스코의 일대기를 그렸다. 성서 속의 인물들만이 성당 벽화로 그려질 수 있었던 시대에 당대의 인물이 그려진 것은 파격적인 일이다. 가장 낮은 존재를 자처했던 그가 교회에 의해 성서 속의 신성한 인물처럼 승격된 것이다.

멀리서 바라보는 성당의 모습은 봉건영주의 성채와 다름이 없다. 빈민의 무덤에 묻히기를 바랐던 그의 유지와는 달리 웅장하고 호화스러운 성당 지하에 묻혔다. 그것이 성인의 유지를 받들고 그 유적을 거룩하게 하는 것일까? 마치 ‘청빈하게 살자’라는 표어를 비싼 보석으로 장식하여 걸어 놓은 것과 다름이 없다. 성인이 다시 온다면 이 건물들 몽땅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되돌려 주고 다시 발가벗은 채 이곳을 떠나지 않을까.

낙동강 변에 있는 명례성지를 생각한다. 1886년 병인박해 때 순교한 신석복의 생가와 일제시기 명례성당이 있었던 곳으로서 2007년 천주교 성지가 된 곳이다. 야트막한 언덕 위에서 일제시기에 지어진 작은 기와집 한 채와 만난다. 앙증맞은 철골 종탑, 양철지붕에 서 있는 마리아상, 그야말로 눈꼽 만큼도 보태지 않은 그 시대의 재현이다. 이보다 더 성스럽고, 묵직한 감동이 있을 수 있을까. 억새가 은빛 털을 일렁이는 강변의 풍경은 은총이며 축복이다.

감동의 절정은 성당 뒤편에 무심하게 버려진 동네 저수조에서 만난다. 콘크리트 벽과 천장 일부를 깨내어 작은 입구와 천창을 만들었을 뿐이다. 어두컴컴한 실내에서 쏟아지는 빛줄기 아래 팔 벌린 나무십자가. 나도 모르게 무릎을 꿇었다. 아무도 그 공간이 왜 만들어진 것인지 설명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름도 몰랐던 한 순교자와 그를 따르려 모였던 신자들을 기억하게 만든다. 이곳이 바로 성지이며 성역이다.

강영환 울산대학교 명예교수

 

저작권자 © 경상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