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외고산옹기마을과 장인들-(상)흙으로 인생을 빚는 무형문화재 배영화

▲ 배영화 장인의 옹기로 만든 달항아리.

‘울산의 쟁이들’은 ‘세상이 알아주지 않아도 그저 담담하게 그 길을 걸어가는 사람들’에 대한 기록이다. 울산을 기반으로 오랜 기간 전통문화 분야에 몰두하며 최고의 열정과 기량을 보여준 사람들을 인터뷰하고 그 생애와 기예를 소개한다.

옹기의 세계, 재능만큼이나 집념 필요
최소 5년간 밤낮 공방에 붙어 배워야
대부분은 큰 독 만드는데 이르지 못해
한국 옹기 세계 다니며 자랑하고 싶어
흙에서 와 흙으로 돌아가는 옹기 그릇
우리 인생과 닮았기에 더 보존하고파

물에 섞은 흙을 빚어 바람에 말리고 나무를 태운 불에 구운, 자연이 만든 그릇, 옹기.

울산시 울주군 온양읍 외고산 자락에 위치한 ‘외고산옹기마을’은 국내 최대 규모의 옹기촌이다. 이제는 ‘울산세계옹기문화엑스포(2010)’를 개최할 정도로 성장하였지만, 그 시작은 1958년 허덕만이라는 경상북도 영덕 출신의 한 옹기장인이 만든 가마와 점방일 뿐이었다. 허덕만 장인이 옹기마을에 정착한 후로 그에게 옹기 만드는 법을 배우려고 마을에 자리 잡은 이들이 하나 둘 늘어갔다. 그중 유독 허덕만 장인을 부모처럼 따랐던 이가 바로 울산시 무형문화재 제4호 옹기장(2009년 지정) 7인 중 한명인 배영화 장인(1942년생)이다. 현재 그와 함께 또 다른 장인들 신일성·조희만·진삼용·서종태·장성우·허진규 장인이 각각 공방을 운영하며 옹기마을을 이끌어 가고 있다.

배영화 장인은 허덕만 장인과 같은 고향 출신으로 그는 10대 때 동네 교회에서 허덕만 장인과 처음 인연을 맺었다. 당시 옹기 만드는 일은 집안 형편이 어려워 시작하는 이들이 많았기에, 여유 있는 집에서 태어난 배영화 장인의 경우 옹기일에 대한 집안 어른들의 반대가 심했다고 한다. 그러나 옹기 하나 제대로 배우면 평생 남을 속이지 않고 자신의 기술로 먹고 살 수 있다는 생각에 배영화 장인은 열여덟에 외고산 마을로 들어와 허덕만 장인에게 옹기 만드는 법을 배웠다. 1968년에는 옹기 가마를 독립해 ‘영화요업’을 열었다. 60년 세월 동안 옹기쟁이 외길 인생을 걷고 있는 것을 보면 결국 옹기는 그에게 하나의 소명이었는지 모른다.

그러나 그 자신은 일생을 바쳤다고 해도 요즘 젊은이들에게 이 길은 험하고 힘든 일로만 보일 것이다. 옹기의 세계는 타고난 재능만큼이나 집념을 가지고 여기에만 몰입해야 하는 시간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어쩌다 옹기를 배우는 이들이 나타나 반갑다가도 그들 대부분이 큰 독을 배우는 데까지 이르지 못하고 생활용품으로 쓸 적당한 크기의 그릇을 만드는데 머무는 것을 보면 안타깝기도 하다.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제자들에게 그릇을 사용하는 이를 생각하며 만들 것을 재삼 당부하는 일 뿐이다.

▲ 배영화 장인의 영화요업 내 옹기공방.

“지금 문제는 옹기 도공이 양성 되느냐인데, 전국적으로 독 짓는 사람이 길러지지 않는다는 게 제일 안타까운 일이야. 독 작업이 너무 힘들고 그러니까 배우질 못해요. 독을 하려면 최소한 밤낮 공방에 붙어 한 5년은 해야 해. 우리가 배울 때는 남이 잘 때 밤에 혼자 와가지고 이래 배웠는데. 옹기를 배울 때는 몰입, 몰입을 해야 해. 후배들에게는 아무리 못 만들어도 니가 만든 것이 누군가에게는 요긴하게 쓰인다. 그걸 생각해라. 쓰는 사람을 생각해라. 삐뚤면 삐뚠 대로, 무거우면 무거운 대로 누군가가 쓰는데, 이거 어떤 놈이 만들었노? 그 소리 안들을라면 알아서 해야 될 거 아니냐. 우리 배울 때 그래 배웠고.”

평생 옹기마을을 거의 떠난 적이 없는 장인이지만 우리 옹기만큼은 전 세계를 다니며 널리 자랑하고 싶다. 이에 그는 옹기를 만드는 가운데도 기회가 있을 때마다 마을의 다른 장인들과 함께 외고산 옹기를 소개하는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왔다. 미국과 일본, 중국뿐만 아니라 멀리 이스라엘과 최근에는 라오스에까지 가서 서로의 옹기문화를 교류하였다. 세계 각지의 옹기쟁이들을 만나 그들의 옹기를 배우고 우리의 옹기를 전하는 일은 그에게 사명과도 같다.

“옹기 축제나 행사를 하면서 일본이나 중국, 유럽의 도공들을 부르면 뭐가 좋은가 하면 우리 옹기를 선전하잖아. 내가 이스라엘 박물관 초청으로 가서 옹기 시연도 하고 전시도 하는데, 거기는 옹기 만드는 건 하나도 없고 그냥 옛날 원주민들 토기 같은 것만 남았어. 큰 단지들도 이제 다 사라지고 박물관에만 있는 거라. 그런데 한국에는 아직도 옹기가 남아 있고 만들고 있다, 이게 엄청난 광고 효과거든. 그 사람들이 여 한 번 와서 옹기 만드는 걸 보고 가면 완전 이미지가 달라져. 한국의 옹기를 선전하는 기라. 한국에 이런 게 아직 살아있다는 것을.”

배영화 장인이 옹기를 통해 그토록 전하고 싶은 것은 과연 무엇일까.

글= 노경희 전문기자

“그 당시 한 30~40명 옹기 만드는 사람이 있어도 다 자기가 만든 걸 금세 알아보거든. 어디 가서 내가 만든 물건 딱 보면 엄청 반갑지. 아직도 내가 만든 게 살아있다는 게. 물론 언젠가는 깨지는 거야, 수백 년 가지는 않잖아. 그릇은 깨지기 위해서 있다. 그래 자연으로 돌아가는 거지. 우리 인간이 살다가 어느 때가 되면 가잖아. 그릇도 결국 다 깨지는 거야. 그래서 더 보존하고 싶은 생각이 든다 이 말이야, 이 그릇을.”

흙에서 와서 흙으로 사라지는, 우리네 삶 속에 함께 부대끼며 살아온, 사라져버리기에 더욱 잡고 싶은 인생을 닮은 그릇, 그것이 장인의 옹기이다.

글= 노경희 전문기자· 울산대 국어국문학부 교수 사진= 안순태 작가 표제= 서예가 김중엽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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