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잉 개발로 인한 결과인 코로나
신종 바이러스에 대항하기 보다는
자연을 회복시키는 것이 우선돼야

▲ 한치호 마인드닥터의원 원장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코로나사태는 아담의 후예인 인간의 경계 긋기의 산물이다. 공존해야할 대상을 경계 너머로 쫓아내고 말살하며 지구의 주인인양 행세한 결과인 것이다. 그리하여 주기가 갈수록 짧아지는 바이러스의 창궐을 보면서 인류가 부메랑을 맞으며 종말로 가고 있지 않는지 무서워진다.

아담이 지식의 나무에서 행한 원죄는 무엇일까? 부끄러움을 알게 된 것이 문제가 아니라 모든 것에 이름 짓고 서로 별개로 나누며 경계를 긋고 연결을 끊은 것이 원죄인 것 같다. 아담의 후예들이 문명과 과학이라는 도구로 생명의 연결성을 자르고 유아독존적인 개별적 존재로 군림하는 동안 많은 생명이 멸종되었고 지구는 황폐해져 왔다. 인간은 동물을 가축화시키고 볼거리나 먹을거리로도 되지 않는 생물의 서식지는 뭉개버렸다. 그래서 숙주를 잃은 바이러스는 이제 인간을 숙주로 삼게 된 것이다.

경계 긋기의 달인은 그들 안에서도 전선(戰線)을 그어서 다른 대륙의 같은 인간을 미개하다는 이유로 빼앗고 살육해왔다. 역사를 보면 시대마다 종교와 계급의 경계 밖인 자들은 마녀사냥을 당하였다. 이 시대의 마녀사냥은 무소불위의 막강한 제국이 되어버린 미합중국에서 일어나고 있다. 일부 백인의 눈에 흑인은 더럽고 열등한 대상으로 보일 것이다. 그런데 그들이 본 것은 자기 안에 있는 자신의 부끄러운 욕망, 사회에 대한 불안, 코로나에 대한 공포가 만만한 흑인에게 투사(投射)가 되었을 뿐이다. 투사는 인종갈등과 계층갈등에서 검증된 미숙한 심리기제이다.

원자를 쪼개보았던 양자물리학자들은 물질의 근본은 어디에나 있고 어디에도 없는 의식의 알갱이(소립자)임에 충격을 받았다. 결국 인류최고의 과학이 이른 곳은 동양철학의 사사무애(事事無碍, 다양한 형상과 존재들이 경계로 고립되지 않고 서로 완벽한 상호관계를 맺는다)와 불교의 공(空, 모든 것은 영원하지 않고 실체가 없으며 끊임없이 변화한다)이었다. 그 어떤 존재이든 개별적인 존재로서 무경계로 서로 긴밀히 연결되었고 우주는 이러한 네트워크의 장(場)인 것이다. 모든 대상은 단일한 에너지(神, 道….)의 다양한 형상에 지나지 않는다, 고 최고의 물리학자들은 깨달은 수행자처럼 갈파하였다. 우리는 이러한 상호의존적인 생명의 원리를 알량한 지식과 자만심에 빠져 놓쳐온 것이다.

우리가 다른 생명에 저지른 행동, 결국 자기 몸에 자해를 한 것에 대한 업보는 우리에게 돌아올 것이다. 우리가 죽어서 영혼이 우주의 의식에 돌아가 합류하게 되면 깨닫는다고 한다. 모든 의식은 연결이 되어 있는 한 존재이고 각각에 우주의 섭리가 깃들어 있음을. 이러한 것들은 필자의 생각이 아니라 ‘무경계’의 저자 켄 윌버 뿐 아니라 우리 시대 최고 석학과 현자들의 토로이다. 지금 우리는 코로나19바이러스를 박멸시키려고 한다. 백신만 만들면 이겨낼 수 있다고. 그러나 생태학자들은 바이러스를 박멸시킬 수는 없다고 한다. 인류의 잔혹성에 대항하듯 갈수록 짧은 주기로 나타나는 신종 바이러스를 경계 밖으로 쳐낼 수는 없고 제자리에 돌려놓도록 정리하고 회복시켜야 한다고 호소한다. 그때까지 우리는 거리두기를 하면서 우리가 무슨 짓을 하여왔는지 자성해볼 일이다. 자연에 거침없이, 저항 못하는 생명들에게, 힘이 약한 이들에게, 낮은 이들에게 무슨 짓을 하였는지를.

다시 만리장성보다 긴 전선을 만들어 중화로 세계의 패권을 쥐려는 중국, 군국주의 망상으로 다시 위험해지는 일본, 달러화의 위력으로 자국이기주의를 더 공고히 하는 미국을 보면서 이 전선들이 우리를 공멸로 이끌 것임이 느껴진다.

우리가 만들어온 전선의 경계를 허물고 투쟁과 갈등에서 우리를 해방시켜야 한다. 전선 너머의 적은 우리가 만든 더러운 감정이고 환상임을 깨달아야 한다. 그래서 켄 윌버의 말처럼 투쟁은 해결(solved)되는 것이 아니라 해소(dissolved)되게 노력해야 하는 것임을 모두가 알게 된다면 인류는 좀 더 생존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한치호 마인드닥터의원 원장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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