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손규상 천상고 교사

내가 수업을 하는 한 교실 게시판에는 대략 60여 개의 감정 카드가 그려진 ‘감정을 찾아보세요’라는 제목의 포스터가 붙어 있다. 그 교실에 갈 때마다 감정 카드를 유심히 들여다보며 나의 오늘 감정을 찾아본다. 늘 ‘반가움’ ‘설렘’이고 싶지만, 요즘은 ‘서운함’ ‘원망스러움’이 앞설 때가 잦다.

학년별 분산 등교를 하느라 등교에 걸리는 시간이 평소보다 두 배 이상 늘었고 등교 지도에 쏟는 시간도 그만큼 늘었다. 마스크를 착용하고 수업을 하다 숨이 차서 잠시 복도로 나와 숨을 몰아쉬는데, 저 멀리 다른 선생님 한 분과 눈이 마주쳐 멋쩍게 웃었다. 하교 시간에 거리두기가 잘되지 않는다는 고발성 기사가 우리 학교를 배경으로 신문에 실려 부랴부랴 모여 회의를 했다. 학년을 달리해서 두 번으로 나누어 진행하는 급식 시간도, 짧은 시간에 전교생이 동시에 움직이는 쉬는 시간도 긴장되기는 마찬가지이다. 어디까지가 학교와 교사가 책임져야 할 몫일까. 학교 내 통제가 완벽할 수는 없는 상황에서 학교도 교사도 걱정되고 불안한 것은 그 누구의 마음과 다르지 않다. 지금 학교와 교사에게 필요한 것은 왜 그렇게밖에 못하느냐는 다그침이 아니라 따뜻함이 담긴 ‘격려’이다.

돌이켜보면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발생부터 지금까지 수많은 대책이 쏟아졌다. 이를 학교 현장에서 온몸으로 받아 실천해야 하는 교사들에 대한 의견 수렴은 상황의 급박성을 이유로 생략되었다. 이 상황은 학교 내에서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신종코로나 관련 부서에서 학교 자체 방역 업무 분장을 통보하면 나머지 교사는 다소의 불편함이 있더라도 이를 따를 수밖에 없었다. 각각의 목소리를 모두 수용할 수 없으니, 상황에 대한 설명 없이, 의견 수렴 없이, 공평함을 무기로 소통보다는 속도를 택한 셈이다. 어쩌면 우리 교사들을 힘들게 한 것은 신종코로나로 인해 더해진 업무가 아니라 소통의 생략이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지금에서야 한다.

그럼에도 ‘선생님은 선생님인지라’ 소모적인 논쟁을 벌이기보다 당장에 해야 하는 일에 다들 몸을 사리지 않았다. 지금 상황에서 학교와 교사가 할 수 있는 일은 조금이라도 감염의 가능성을 낮추는 일이겠기에, 한 명의 학생도 빠짐없이 발열 확인을 하고, 학생들에게 한 번 더 방역수칙을 교육하고, 학교 방역 체계를 한 번 더 점검했다. 이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전부이고 최선이었다.

오늘도 퇴근을 앞둔 우리 교사들의 얼굴에는 하루를 무사히 끝냈다는 안도와 숨길 수 없는 피곤이 함께 묻어난다. 언제까지라는 기약이 없는 신종코로나의 유행이 우리 모두를 위축시키는 이 순간, 다들 예민하고 날카로울 수밖에 없다. 순간의 방심으로 가다듬지 못하고 드러난 말과 행동이 상대의 마음에 상처를 줄 수도 있다. 독사 스무 마리쯤 길들이는 마음으로 말도 행동도 아껴야 할 때이다. 그리고 소통으로 마음을 나누어야 할 때이다. 그때에야 우리의 감정 카드는 ‘반가움’ ‘설렘’일 수 있다.

“산자락이 여강에 내려앉아/ 입술을 만들었다/ 독사 스무마리쯤 길들이는 마음으로/ 입을 꼭 다물고 있다/ 낚싯줄을 더 내린다/ 말을 얻기까지” (고영민 ‘깊이’)

손규상 천상고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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