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잠리는 삼동면 7개 법정동리의 하나인데, 하잠(荷岑)이란 마을의 생긴 모양이 연잎이 피어있는 것 같다 하여 "연 하(荷)"자와 "봉우리 잠(岑)"자를 따서 하잠(荷岑)이라 부른다고 전해온다. 하잠이라는 이름역시 삼동(三同) 지방의 지명에 ""계(光明系)"의 지명이 많음에 근거해서 고찰할 필요가 있다. 하(荷)의 훈(訓)이 약명 박하(薄)이기도 하므로 "박"으로 약훈차(略訓借)하면 하잠은 ""재" 또는 ""잠"이 되어 광명한 봉우리란 뜻으로 풀이할 수 있다. 세종과 예종 때의 한터(大吐里) 일대로 비정(比定)되는 곳이다.

 축선사(鷲仙寺)는 하잠리에 있었던 절인데, 신라가 백제와 고구려를 멸한 뒤에 김유신(金庾信)이 세웠으며, 그 내력은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각각 전해온다. 신라 36대 혜공왕 15년(779) 4월에 홀연이 회오리바람이 김유신의 능에서 일어나 미추왕릉에까지 이르렀는데, 티끌과 안개가 끼어 캄캄하고 앞을 분간하기 힘든 중에, 김유신 장군과 같이 생긴 사람이 준마를 타고 앞서고 의갑(衣甲)과 기장(器伏)을 차린 40명 가량의 무사들이 그 뒤를 따라 죽현릉(竹現陵 미추왕릉 未鄒王陵)으로 들어갔다. 능지기가 들으니 왕릉 속에서 우는 듯한 소리와 함께 누군가에게 탄식하며 읍소하는 소리가 났다. 그 내용은 이러했다.

 "신(臣)이 평생을 통해 나라의 환난을 구하고 국내를 통일한 공이 있었고, 지금 몸은 혼백이라도 나라를 지켜 재앙을 물리치고 환난을 구하고자 하는 마음이 한시도 변함이 없는데, 지난 경술년에 신의 자손이 죄 없이 죽음을 당했으니 이는 군신이 모두 나의 지난 공을 생각지 않은 것입니다. 신은 다른 곳으로 떠나서 다시는 노력하지 않겠으니 왕은 부디 허락하소서"

 이 말을 들은 미추왕이 대답하되 "나와 공(公)이 이 나라를 지키지 않는다면 저 백성들은 어떻게 할 것인가. 공은 다시 전과 다름없이 노력하라" 하고 세 번이나 간청했지만 김유신은 듣지 않고 회오리 바람을 일으키며 사라졌다. 능지기로부터 이런 말을 전해들은 혜공왕은 놀라 두려워하여 신하 김경신(金敬信)을 김유신 능에 보내어 사과하는 한편, 공을 위해 공덕보전 30결을 축선사에 밭 30결(結)을 내리고 명복을 빌게 하였으니, 이 절은 김유신이 평양을 토벌(討伐)한 후에 복을 비는 식복(植福)을 위하여 지은 것이라 했다.

 축선사는 축성들에 있다가 없어졌으며, 터에서는 여러 가지 유물과 와당(瓦當)이 나왔다. 그 사지(寺址)에서는 여러 가지 유물과 와당(瓦當)이 나왔으나 지금은 대암댐의 축조로 그마저 수몰되고 말았다.

 김유신 장군의 노여움은, 왕릉의 서열(序列)이 오릉(五陵)의 위에 두어 대묘(大廟)라 일컬어질 만큼 신라의 수호에 힘이 컸던 미추왕(未鄒王)의 혼령(魂靈)이 아니었던들 막지 못했을 것이다. 혜공왕 당대에는 통일신라의 정치적 안정이 무너지기 시작하던 때로 왕권이 위협받고 귀족들의 다툼과 반란이 많았으며 수많은 죽음이 뒤따랐었다. 김유신의 혼백이 선왕(先王)인 미추왕을 찾아가 섭섭함과 노여움을 표하게 된 원인도 그 중의 하나였을 법 하다. 다만 삼국통일의 위업을 달성하기 위해 몸을 사리지 않았던 대장군이 자손의 안녕만을 고집하며 노를 발하고 있는 모습에서 오늘의 우리를 다시 한번 되돌아보게 하는 듯 해 못내 착잡한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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