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외고산옹기마을과 장인들
(하)쟁이들 삶터에서 모두가 꿈꾸는 마을로

▲ 오늘날의 옹기마을 전경.

국내 최대 옹기마을 이유 충분
옹기 얼지 않는 따뜻한 온도
가마흙 생산되고 땔감 풍부
인근 남창역 통해 수송 편이

대한민국 최고의 명소로
그저 옹기 생산지에 머물다
2000년대 들어 축제 성공해
대표적인 관광 마을로 거듭
울주군 전폭적 지원도 한몫

더 넓은 세상 꿈꾸는 옹기마을
후계자 양성 위한 전수관 설치
관광객 위한 숙박시설 마련 등
옹기쟁이들의 삶터에서 진화

외고산옹기마을은 국내 최대 규모의 옹기 집산지이다. 1958년 허덕만 장인의 옹기가마가 그 시작이기에 긴 역사를 자랑하지는 않지만, 오늘날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옹기마을이라는 사실만은 변함없다. 외고산과 아무 연고도 없던 허덕만 장인이 이곳에 자리를 잡은 데는, 여기가 꿈속에서 만난 장소였기 때문이라는 전설 같은 이야기도 전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실제 그럴 만한 이유들이 넘쳐나는 곳이기도 하다.

“여기가 온양인데 겨울에 가장 따뜻해. 60년대까지만 해도 전국의 옹기 공장들은 겨울에 얼어서 작업을 못했거든. 근데 여기는 겨울에도 작업을 한 거라. 여기는 아무리 흙을 10, 20미터를 파도 돌 하나 없어. 이 황토로 가마를 박으면 불을 견디는 내화도가 대한민국 최고야. 전통 가마를 박아 놓으면 보통 10년을 못 써. 안에서 1000도가 넘으면 흙이 녹아 내려 앉아. 그런데 여기는 지금 60년째 가마를 그대로 쓰고 있어. 내화도가 워낙 높아서 1200도에도 흙이 안 녹는 거라. 옹기 공장으로는 기가 막히지.”(배영화 장인)

▲ ‘쉼표 카페’에서 내려다 본 옹기마을.

옹기가 얼지 않는 따뜻한 지역, 돌 하나 나오지 않는 좋은 황토 흙, 무엇보다도 1200도의 장작불을 견디는 가마흙이 나오는 곳. 거기에 불을 피울 땔감나무가 풍부하고, 가마를 세우기 좋은 각도로 언덕이 경사졌으며, 옹기의 최대 수요지 부산과 가까운데다 바로 옆에 남창역이 있어 판매와 수송이 쉽다.

이쯤 되면 외고산 마을이 대한민국 대표 옹기마을이 된 것은, 그렇게 되어야 할 곳이 그리 된 것일 뿐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다.

그저 옹기 생산지에 그쳤던 마을은 2000년대 들어서 축제와 세계엑스포(2010)의 성공으로 울산의 대표적인 전통문화 보존 지역이자 관광 마을로 거듭나게 되었다. 이는 당연하게도 옹기를 둘러싼 마을 사람들이 협력하여 이룬 성과이다.

▲ 배영화 장인.

옹기마을의 가장 중심은 옹기를 업으로 삼은 사람들, 장인들과 공방ㆍ상점의 주인들이다. 이들 중 신일성(일성토기)·배영화(영화요업)·조희만(성창요업)·진삼용(금천토기)·서종태(경남요업)·장성우(가야신라토기)·허진규(옹기골도예)·고(故) 최상일(영남요업) 장인은 2009년 울산시 무형문화재 제4호 옹기장에 지정되었으며, 또한 허진규 장인의 경우 작년에 울산 최초로 문화체육관광부와 한국관광공사에서 주관하는 ‘지역명사’에 선정되기도 하였다. 이들 장인은 전통 기법을 고수하면서 최고의 옹기를 만들고자 노력하는, 변하면서도 변하지 않는 옹기처럼 마을을 단단히 지탱하는 존재들이다.

“옹기는 없어질 수가 없어요. 옹기에 담으면 음식의 변질이 없거든요. 옹기는 물건만 잘 만들면 사가서 써 본 사람이 오고 또 오고 그래요. 옹기를 만들면 형(모양)을 자기 취향대로 다 할 수 있어요. 어떻게 하면 각이 지고 형이 변하는데 거기에 수수한 예술의 미가 있고, 재미가 있어요. 그러면서도 옛날하고 지금하고 같아. 김치나 발효 음식 그릇들은 다 옛날 모양 그대로지. 모든 것이 유행을 따라 가는데 옹기는 변하지 않아.”(조희만 장인)

▲ 조희만 장인.

옹기마을이 이렇게 전국적인 명소로 거듭나게 된 것에는 울산시 울주군의 지원 또한 큰 역할을 하였다. 옹기마을에는 울산옹기박물관을 중심으로 옹기아카데미관, 울주민속박물관 그리고 며칠 전 개관한 발효아카데미관 등 옹기를 소개하고 체험할 수 있는 공간들이 울주군 공무원들의 손을 통해 운영되고 있다. 이들은 마을이 옹기의 삶과 문화를 구현하는 공간으로 진화할 수 있도록 관의 지원을 이끌어내고 그 실무를 담당하고 있다.

▲ 1960년대 옹기마을. 나무상자에 옹기를 포장하는 모습.

마을에는 옹기가 아닌 다른 일로 생업을 꾸리며 살아가는 이들도 적지 않다. 장작불의 가마솥에 끓인 추어탕과 잔치국수를 파는 마을 유일의 식당 ‘옹기마실’, 조희만 장인의 아들 조명철 후계자가 아버지의 성창요업 창고 자리에 세운 자신의 공방이자 마을의 하나뿐인 찻집 ‘쉼표카페’가 그것들이다.

“옹기마을의 미래에는 다양성이 있으면 좋겠어요. 나는 수작업으로 할래, 나는 틀로 찍을래, 나는 카페를 할래, 그런 사람들을 모두 존중하는. 이건 좋고 저건 좋지 않고, 라는 식의 선을 긋지 않으면 좋겠어요. 옹기마을에는 할아버지 할머니부터 손자까지 다 와요. 삼대가 같이 즐길 수 있는 공간이에요. 전통문화의 관광지, 발효음식과 함께하는 문화 공간, 옹기 생산을 위한 산업 공간, 이 모든 곳이 될 수 있는 곳이죠.”(조명철 후계자)

▲ 조명철 후계자.

외고산옹기마을은 이제까지 옹기쟁이들의 삶터이자 일터였다. 그러나 이제는 더 넓은 세상으로 그 문호를 넓히려 한다. 후계자 양성을 위한 전수관 설치, 관광객들을 위한 숙박 시설 마련, 다양한 음식들이 펼쳐지는 먹자골목과 카페거리 만들기, 각자가 처한 입장에서 나오는 서로 다른 바램의 목소리들에 귀 기울이고, 이를 함께 고민하며 최선의 실현 방법을 찾는 것. 마을 사람들 모두가 소통하면서 함께 어우러지며 살아가는 것이 옹기마을을 진정 옹기마을답게 만드는 일이 되리라.

 

 

글= 노경희 전문기자·

울산대 국어국문학부 교수

사진= 울산시·옹기마을 제공

표제= 서예가 김중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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