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70주년 보낸 ‘울산 참전용사’ 성대식씨

경찰로 참전 전쟁 잔혹사 경험

무장공비 토벌중 총상 입기도

국가유공자 처우 개선 강조

▲ 지난 26일 중구 보훈회관에서 만난 6.25 참전용사 성대식(89)씨가 전쟁 당시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폐허가 된 고향으로 돌아가니 민간인, 국군, 인민군, 미군 할 것 없이 사체가 가득했다. 생각하기도 싫은 끔찍한 장면이었다. 다시는 이같은 참혹한 전쟁이 되풀이돼서는 정말 안된다.”

올해는 6·25전쟁 70주년이 되는 해다. 울산에도 전쟁으로 인한 상이군경(전투나 공무 중에 몸을 다친 군인·경찰관)이 2000여명이 넘고 국가유공자는 4만명 가량 된다.

지난 26일 중구 보훈회관에서 만난 6·25 참전용사 성대식(89)씨는 6·25 전쟁이 발발한 1950년 당시 19세였다.

성씨는 “전쟁이 시작되자 경남 창녕에서 청도까지 천왕산을 넘어 피난을 가야 했다”며 “국군이 인민군을 격퇴하면서 북진하자 피난갔던 사람들도 하나 둘씩 돌아왔다. 고향으로 갔지만 집이 다 타는 등 마을은 그야말로 폐허 상태였다. 인민군, 국군, 미군 할 것 없이 폭격으로 인한 사체가 쌓여있는 걸 두 눈으로 목격했다”고 운을 뗐다.

성씨는 당시 인민군이 패퇴하면서 합류하지 못한 무장공비들이 지리산 등 산자락에 숨어있다가 민가나 관공서를 습격하고 민간인을 잔인하게 죽였던 시기로 기억한다.

이후 성인이 된 성씨는 1952년 경찰에 지원, 경남경찰 공채 58기로 합격해 6·25 전쟁에 참여하게 된다.

성씨는 울산에서 참여한 작전에서 평생 상처로 남을 부상을 입었다. 성씨가 울산으로 온 건 1953년 1월께였는데 신불산에도 무장공비가 출몰, 민간인을 납치하고 살해하기도 했고 관공서를 기습하거나 철도를 파괴하는 등의 행위를 벌였다.

특히 성씨는 신불산 무장공비 토벌 작전에 투입됐다가 무장공비와 교전 끝에 가슴과 손 등에 총상을 입었다. 당시 신불산 배내골(양산 원동면 중턱) 인근 원동초등학교에 주둔중이었는데 “무장공비가 식량을 탈취해갔다”는 신고가 들어와 곧바로 작전에 투입됐다. 무장공비를 수색하던 성씨는 당시 3~4명의 공비와 교전을 벌였다.

성씨 “총상을 입었는데도 다친 줄도 몰랐다. 따뜻한 느낌이 나서 보니까 피가 철철 흐르고 있었다. 이후 동료들이 부축해 병원으로 이송됐다”고 말했다.

당시 전투경찰대는 무장공비 1명을 사살하고 무기 등을 획득했지만 나머지 무장공비는 도주했다.

이후 성씨는 치료를 받고 부대로 복귀했고 휴전 후에도 전투경찰대에 근무하면서 공비 토벌 작전을 수행했다. 1960년께는 울산경찰서로 발령받고 울산에 정착했으나 10년 후인 1970년, 신불산 작전에서 입은 상이 후유증 탓에 40살도 되지 않은 나이에 경찰에서 퇴직해야 했다.

목숨을 걸고 나라를 위해 싸운 이들이지만, 이에 대한 처우는 여전히 미흡하다. 성씨는 국가유공자에 대한 처우 개선이 시급히 이뤄졌으면 좋겠다는 소망도 얘기했다.

지역에서 참전유공자 명예수당 현실화와 불합리한 수당 체계 개선 등의 목소리가 지속적으로 나오고 있지만, 실제 반영은 여전히 더디기만 하다.

김불식 상이군경회 울산지부장은 “전상군경들은 참전명예수당이나 전상수당을 받지 못하고 상이등급에 대한 수당만 받고 있다. 하루 빨리 개선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정세홍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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