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수원 전 울산보건환경연구원장

10여년 전 심완구 시장과 나눈 대화다. “시장님, 선산도 천곡에 있고, 물도 좋고 공기도 맑고 인심도 좋은 우리 마을로 이사해서 저와 한 동네 삽시더.” “당신이야 땅도 있고 집도 잘 지어 형편이 단단하지만, 나야 강동정자에 조그마한 아파트 한 채 뿐이고 집사람에게 얹혀 사는 처지인데 뭐 있어야 천곡으로 이사를 하지.” 임기가 끝나갈 즈음, 사실도 아닌 비리에 휘말려 고생을 하실 때 선산에 오셨다가 우리 집에 들렀을 때 이야기다.

심 시장이 영면하셨다. 울산동강병원에 장례식장을 마련했고 장지는 천곡 선영이라는 부고가 날아왔다. 살아 생전에는 못 오시고 명이 끝나고 오시는구나. 그래도 이승과 저승은 이웃사촌이 되는데 어떻게 모셔야 할지 걱정이 되었다.

나는 환경부에 근무하면서 고향 울산의 공해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의지를 갖고 1992년 11월 울산시로 옮겨왔다. 중구청과 남구청 환경위생과장으로 근무하다가 첫 민선단체장이 된 심완구 시장이 취임하고 몇 달 지나 울산시 환경보호과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당시만 해도 울산은 공해백화점이라 불렸다. 환경보호과의 일은 끝이 없었다. 어느 날 심 시장은 환경보호과 직원들을 G백화점 스카이라운지 중국관에 불러 짜장면을 사주면서 “공해도시 반대말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친환경 도시’라고 했더니 “그러면 오늘부터 우리는 ‘친환경도시 울산’을 만들자”고 하셨다.

태화강 살리기, 태화강 생태공원 조성, 푸른 울산 선포, 시가지 나무 심기, 기업체 환경 시설 투자, 하수 처리시설 확충, 환경국 설치, 보건환경연구원 개원 등 친환경도시를 향해 있는 힘을 다했다. 심시장은 원칙을 중시하며 업무에는 열정적이었다. 잔정이 많았으며 공은 잊지 않고 챙겼다.

보건환경연구원 개원 때 내무부와 보건사회부의 인맥을 활용해 설치의 당위성을 주장하여 야음동의 낡고 비좁은 건물을 떠나 옥동에 새로운 부지를 선정해 주셔서 현 청사를 건축, 이전했다. 공직을 마치면서 펴낸 <울산 환경을 생각하며>라는 내 책에 “환경문제가 최대의 현안인 울산에 있어서는 참으로 소중한 사람”이라며 “그 경험과 지식, 열정이 오늘의 울산환경을 만든 밑거름이 됐다”고 격려해주셨다. 9년 전 어느 날 아내를 저 세상에 보냈을 때, 외아들 결혼식 때, 모친상 때도 잊지않고 챙기셨다.

이렇게 시장님으로부터 받은 사랑은 많았는데 나는 보답을 했나 곰곰 생각해 보니 건건이 퇴짜였다. 사모님 별세 때 부의금도 되돌려주셨고, 모친상 때도 부의금을 사절하셨다. <그래도 그를 용서해야 하나>라는 억울한 마음을 담은 책을 출간해야 했던 그 가슴 아픈 사연을 이야기하면서 눈시울을 붉히시던 모습도 생각난다.

자는 둥 마는 둥 밤을 지새우고 일어나서 동강병원 장례식장 빈소를 찾았다. 꽃 연단에서 자세하나 흐트리지 않은 꼿꼿한 모습으로 나를 내려다 보며 ‘당신왔소’하는 것 같았다. 하얀 국화꽃 한 송이를 영정 앞에 올리고 분향을 하고 술 한잔 부어 올리니 눈물이 났다. “폐암도 이겨낸다고 했는데…. 10년 넘게 병마와 싸우시느라 고생하셨습니다. 모든 것 다 잊으시고 우리 마을에 오셔서 이승과 저승으로 저와 함께 편안히 삽시더.” 빈소를 지키는 지인들에게 우리 마을 오신다니 내가 필요한 일이 있으면 연락달라고 하고 장례식장을 나왔다.

장례일, 아침에 일어나서 선영에 들렀다. 풀만 베어 놓고는 아무도 없었다. 한참 뒤에 다시 갔더니 석재공장에서 와서 작업 중이고 지관도 와 있었다. 살아 생전에 만들어 놓은 석재 분골묘는 모두 철거하고 직사각형(가로 2m, 세로2m) 석관 분묘를 준비했다. 부모 옆 남쪽에 모셨던 부인 묘소도 파분해 시장과 꼭 같은 묘를 준비했다. 심 시장은 한줌의 유분이 되어 도착하셨다. 곧바로 준비해 둔 석관 중앙에 흙을 파내고 그 속에 유분을 넣고 상주들이 흙으로 덮었다. 이승과 저승에서의 관계이지만 수시로 산소에 들러 잘 계시는지 살피며 살아갈까 한다. 이수원 전 울산보건환경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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