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여년 전 시집와 평생을 살아온 울산
각종 병환에 집문제로 정든 고향 떠나
어머니가 안계신 울산 이젠 서먹할 듯

▲ 박기준 전 부산지방검찰청 검사장

며칠전 어머니를 서울행 KTX에 태워드렸다. 울산을 떠나 안양의 동생집으로 이사하는 것이다. 잘나지 못한 큰 아들 마음은 무겁고 죄스럽다. 일 보러 울산에 오면 들렀고 하룻밤 자야 할 때도 어머니 집은 좋았다. 앞으로 울산에서의 일박은 변두리 작은 오피스텔에서다. 어머니 집에서 챙겨온 쓰던 가재도구와 비품 등을 정리하다 보니 어머니 손길이 느껴져 마음이 찡하다. 이제 어머니가 살지 않는 울산의 밤은 예전과 달리 서먹한 느낌으로 다가올 듯하다.

휴전선 접경 강원도 고성군 거진읍에서 자라고 6·25를 겪은 후 60여년전 시집와 산 울산은 어머니에게 고향이다. 역으로 가는 중간에 ‘그래도 나는 울산이 살기가 좋다’고 하신다. 20여년전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80세 중반까지 홀로 살아오면서 수년전부터 황반변성이 심해졌고 허리디스크로 병원 신세를 늘 지면서도 스스로 살아가야 한다는 생각이 강하셨다. 작년에는 탔던 버스가 행인을 피해 급정거하는 바람에 내리려다 기둥에 부딪쳐 충격으로 척추를 다쳐 달포가량 입원하기도 하였다. 독립심 강한 성격에 고집이 더하여 힘들게 버텨 온 것은 평생을 살아온 곳을 떠나는데 대한 아쉬움과 허전함 그리고 작은 두려움 때문이리라.

5년전에 전세든 아파트의 집주인이 최근 집을 팔아야겠다고 하였을 때 마침 힘든 나홀로 생활을 포기하기로 마음을 바꾸셨다. 옷가지를 정리하고 손때묻은 가재도구를 버리면서 ‘아직 쓸 수가 있는데’라고 하신다. 가지고 가겠다는 어머니와 버리자고 하는 동생과의 다투는 모습은 한편으로 이해가 된다.

이사는 힘들다. 요즈음엔 이사전문업체가 생겼지만 예전엔 옮길 짐은 스스로 꾸려야 했다. 필자도 지방 근무때에 혼자 내려가 주말부부로 지낸 경우가 왕왕 있었다. 기업체가 많은 울산에 직장때문에 혼자 내려온 임직원들이 한때 ‘울총(울산 총각)’이라고 재미있게 불리기도 하였다. 이러한 이사는 시간이 지나면 돌아갈 수 있는 일시적인 것이지만 이번 어머니의 이사는 의미가 다르다.

10여년전 필자가 부산 검찰에 근무할 때 관사에서 어머니와 잠시 생활한 적이 있었다. 그 시절 필자는 행복했다. 그러나 본의 아니게 어머니에게 많은 고통을 안겨드린 사건이 바로 그 시절이었다. 당시 필자가 오래전 알고 지낸 갱생보호위원(법사랑위원)이었던 지역 건설업자가 부산 검찰에서 변호사법위반으로 구속되고 추가 범죄가 드러났는데 그 업자는 선처 청탁이 통하지 않자 앙심을 품고 그 동안 알고 지냈던 검사들과의 만남을 접대라고 자랑(!?)하면서 허위 과장해 모 언론에 제보, 시끄럽게 한 일이 있었다. 필자는 기관장으로서 그 사건을 법과 원칙대로 처리했고 그 업자는 징역을 살았으며 그 뒤 한두번 더 사기죄로 처벌받았다. PD에게 호통치는 필자 목소리가 뉴스에 나오고 검사들이 지역 업자와 오랫동안 유착됐다는 비판 보도에 어머니도 괴로웠을 것이다. ‘PD에게 잘 설명하지 그랬느냐’는 말씀 외에 다른 얘기를 하신 적이 없다. 그 MBC PD는 필자와의 통화 녹음을 짜깁기하고 그 범법자의 거짓말에 따라 사실 왜곡해 ‘청탁을 들어주지 않고 법과 원칙대로 처리한 사건’을 ‘검사들이 지역 업자에게 향응받은 사건’으로 변질시킨 소설같은 프로를 만들어 재미를 보았고 이후에도 필자를 괴롭히는 좀비같은 행태를 보였다. 아들에 대한 해코지에 ‘남에게 피해를 주어서는 안된다’는 일념으로 살아온 어머니도 속으로는 분노하였을 것이다. 4년전 필자가 선거에 낙선해 어려웠을 때 어머니는 매일 말없이 절에서 기도를 드렸다.

이 모든 기억들은 어머니 가슴속에 새겨져 있을 것이다. 어려운 살림살이에 자식 뒷바라지를 하면서 한평생 살아온 애환이 서린 곳을 육체가 쇠락한 시기에 떠나는 마음속엔 만감이 교차할 것이다. 고향에 대한 애정과 추억은 아들에게 그대로 전달되고 있다.

박기준 전 부산지방검찰청 검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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