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서읍 서사리 내사마을은 창원황씨 양은공파의 집성촌이다. 다운동에서 척과 방향으로 계속 직진하다 서사교에서 좌회전 해 중리 방향으로 차를 돌리면 바로 내사마을이다.

 현재 내사마을에는 창원을 본(本)으로 하는 황씨 일가들이 10여 집 살고 있다. 황씨는 지금도 이 마을에서 수가 많지만 옛날에는 40여 집이 이 마을에 살았다. 담 넘어 일가 친척들에게 아침인사를 하며 안부를 묻던 전형적인 집성촌이었다.

 내사마을은 급격한 도시화로 옛 시골풍경을 찾아보기 힘든 다운동과 인접해 있지만 여전히 옛 시골의 정취가 살아있다. 마을의 뒤로는 국수봉과 옥녀봉이 마을을 감싸고 있고, 앞으로는 척과천이 흐른다.

 마을 뒤로 난 길을 따라 올라가면 호젓한 산길이 나온다. 산에서 흐르는 물에는 물고기들이 떼를 지어 유영한다. 물은 손이 시릴 정도로 차고 맑다.

 마을 언덕에서 동네를 바라다보면 나지막한 기와집이 두 서너집 단위로 정겹게 모여있고, 최소 80~90년은 됐을 거목들이 군데군데 눈에 띈다. 특히 옛날 시골학교에서 담 대신 둘렀던 탱자나무 담이 눈길을 끈다.

 간간이 비가 흩뿌리는 초겨울, 서서히 여물어 가는 탱자나무의 날카로운 가시는 아직도 옛 흔적을 간직하고 있다는 꼬장꼬장한 내사마을의 성격을 보여주는 듯 하다.

 창원황씨의 울산 입향조는 양은공(楊隱公)이다. 휘호는 봉하(奉河)고 자는 덕보(德甫)다. 고려 때 문하시중을 지낸 황충준(忠俊)의 13세손으로 300여년 전 울산의 양정동에 처음 정착했다.

 양은공의 아버지는 조선 숙종 때 이조판서를 지낸 흠(欽)이다. 양은공은 흠의 여섯 아들 가운데 막내로 숙종 계해년(1683년) 한양에서 출생했다. 어릴 때부터 남달리 총명해 12세에 모든 문자에 능통했고 약관에 사서삼경을 통달했다고 한다.

 하지만 양은공의 아버지 흠은 공이 어린 나이에 관직에 오르는 것을 엄하게 경계했다. 그 자신이 조정 내의 시기와 모함으로 벼슬에서 물러나야 했기 때문이다.

 월성 최현필이 쓴 "양은공비명"에 따르면 양은공은 경술년(1730년)에 아버지 흠이 돌아가시고 어머니 최씨마저 세상을 뜨자 세상에 대한 원망과 괴로움을 이기지 못해 산천을 해맸다. 그리고 울주 양정리에 이르러 몸 숨겨 마음편히 지낼 곳이라며 가솔들과 함께 정착했다.

 양은공은 양정리에 몸을 숨긴 채 "안빈낙도"한다는 의미에서 호를 "양은"이라 짓고 사는 집을 "청양정"이라 이름 붙였다. 그리고는 세상과의 소통을 애써 피했다.

 황지순(64)씨는 "아침 저녁으로 찾는 사람이 있었지만 만나주지 않아 무엇을 하는지 알 수 없었고, 베옷과 성긴밥만이 자신의 분수에 맞다고 여기며 평생을 사신 분이 양은공"이라고 말했다.

 영조 을유년(1766년)에 양은공이 세상을 뜬 뒤 양은공의 손자 인희(仁熙)는 거처를 해안가인 양정에서 서사리 내사 쟁골로 옮긴다. 쟁골의 공식 명칭은 재앙골(齋內谷)로 재 안쪽 깊숙이 외떨어져 있다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양은공의 손자 인희가 거처를 옮긴 이유는 명확하지 않다. 양은공의 후손들은 아마도 해안가는 양반이 살기에 적합치 않은 곳이라는 유교적 인식 때문인 듯 하다며 추측할 뿐이다.

 양은공의 후손들은 내사마을 쟁골에서 대대로 세상과 등진 채 농사를 지으며 300여년을 지낸다. 하지만 한일합방과 한국전쟁이라는 현대사의 질곡을 지나오면서 집성촌의 와해는 가속화된다.

 지금 내사마을에 형성된 집성촌은 한국전쟁 이후에 형성된 것이다. 한국전쟁 당시 정부가 공비로부터 주민들을 보호한다는 이유(독가촌 일소방침)로 주민들을 산 아래 마을에 정착시켰기 때문이다.

 황씨는 "한국전쟁 이후 지금까지 이곳에 집성촌을 형성해 살고 있지만 마을 분위기는 예전 같지 않다"며 "젊은이들은 제 살길 찾아 모두 외지로 떠나고 거동이 불편한 노인들이나 이곳에 남아 농사를 짓고 사는 형편"이라고 아쉬워했다.

 내사마을 출신 인물 가운데는 교육계에 종사하는 사람이 많다. 아마도 세상을 등진 채 숨어살며 학문 정진에만 몰두했던 입향조 양은공의 피가 지금까지 흐르기 때문은 아닐까.

 황치홍 전 울산시교육위원회 부의장과 황치위 부산시교육위원이 내사마을 출신이다. 황윤구씨는 교직에서 퇴직한 뒤 범서읍지편찬위원회 고문으로 활동했으며 그 아들 기태씨는 대를 이어 경남 산청읍 산청종합고등학교에서 교사로 재직 중이다.

 이밖에 삼흥건설 대표 황선송씨가 이 마을 출신이며 부산에서 개인병원을 운영하고 있는 황영순씨도 이 마을에서 자랐다. 과거에는 공무원으로도 많이 진출했지만 지금은 대부분 작고해 살아남은 후손들의 기억에서 흐릿하다. 서대현기자 sdh@ksilb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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