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청난 재정·시간 요구되는 정책에서
변화·혁신 올바른 방향성 갖지못할때
비가역적 정책은 파국 향해 나가는 것

▲ 남호수 동서대 융합전자공학과 교수

열역학 제2 법칙에서 열은 고온에서 저온으로 이동하며, 이때 엔트로피는 반드시 증가하게 된다. 반면, 저온에서 고온의 물체로 열을 운반하면서 그 이외의 어떠한 변화도 남기지 않는 역과정은 불가능하다. 즉, 일이 열로 변하는 과정은 비가역적이다. 일반적으로 비가역성은 시간의 흐름을 전제로 하기에 시간 역시 거꾸로 되돌리지 못하는 것은 당연하다. 하나의 예로, 뜨거운 물이 든 용기와 차가운 물이 든 용기를 서로 맞대어 놓고 시간이 지나면 두 용기의 물의 온도 차이가 작아져서 두 용기의 물 온도는 미지근해질 것이다. 반대의 경우가 가능할까? 한쪽의 용기에 있는 열기를 다른 용기에 전달해서 이 용기의 물은 더욱 차가워지고 다른 용기의 물은 에너지를 받아서 더욱 뜨거워지는, 즉 원래 각기 뜨거운 물과 차가운 물을 가지고 있는 용기로 되돌아가는 것은 불가능함을 잘 알고 있다.

벌써 10년이 지났다. 북한의 비핵화와 관련하여 완전하고도 되돌릴 수 없는 비핵화, 즉 북한이 비가역적(irreversible)인 비핵화(denuclearization)를 이루면 남북 및 북미 관계 정상화와 경제제재 해제 및 공동평화와 번영을 위한 지원을 담보로 협상을 진행해 왔다. 여기서 북한의 비가역적 비핵화가 무엇이며 가능한 것인가를 고민해볼 필요가 있다. 마치 우리가 담배를 끊겠다고 했다가 다시 피우게 되는 것과 다름없기 때문이다. 도대체 어떻게 해야 금연이라는 것이 비가역적일 수 있을까. 정치적 수사가 아닌 실질적인 비가역적 비핵화가 정말 어려운 이유이다.

지방분권과 국가균형발전은 해묵은 난제이다. 수도권 집중화가 가속되는 가운데 현 정부 초기 이전의 노무현 정부보다 더욱 발전된 국가균형발전 정책을 강력하게 추진할 것이라고 천명하였건만 오히려 수도권 집중을 부추기고 있다. 이전 노무현 정부에서는 국가균형발전을 위한 혁신정책을 펼치면서 ‘대못을 박겠다’는 비가역적 조치를 취한 정책이 있긴하다. 대표적인 것이 혁신도시 사업이다. 지금도 전국 10여곳에 혁신도시와 이곳에 특화된 공공기관이 이전돼 운영되고 있다. 여전히 균형발전 측면에서 종합적이기에는 부족하고, 또 완전히 비가역적이진 않겠지만 대못을 흔들거나 빼려고 하지는 말아야 할 것이다.

흔히 비가역적 행위나 정책은 변화와 혁신을 감행하기 위한 수단으로 활용되곤 한다. 한마디로 저지르는 것이다. 돌이킬 수 없도록 말이다. 여기에서 두 가지 경우를 고려해 볼 수 있는데, 첫째는 올바른 방향성을 갖고 있는데, 물론 이 자체 또한 제한적 진리일 수 있겠지만, 주저하거나 반발을 의식해서 밀어붙이지 못한 것들을 실행하기 위한 수단이다. 둘째로는 관점의 차이이긴 하지만 경도된 의도를 실행하기 위한, 이해타산에 기인한 정책을 고착화하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되는 경우이다. 당연히 그 변화와 혁신이라는 것이 올바른 방향성과 지향점을 갖지 못한 경우에 비가역적 정책을 펼치는 것은 그야말로 파국을 마중 나가는 것임에 다름 아니다.

일반적으로 자연현상에서 물리적, 화학적 비가역 현상은 흔하지만, 사회현상에서의 엄밀한 비가역성은 예를 찾기가 쉽지 않다. 그러나 사회현상에서 잘못된 부분에 대한 가역성 회복은 가혹한 대가를 요구한다. 천문학적 재정투입이 필요하거나 엄청난 시간이 요구되는 일도 있다. 탈원전 정책 가속화, 최저임금의 급속한 인상, 노동개혁, 재벌개혁과 사법개혁으로 펼쳐지는 정책과 이데올로기들, 한반도 평화와 대북정책, 미·중·일을 위시한 외교정책은 또 어떠한가. 소통과 합리의 이치를 꾀하여 만들어 나가야 할 미래가 비가역적 대못 박기로, 돌이키지 못할 세상으로의 전이로 함부로 이루어져서는 안 될 일이다. 지금 우리는 정녕 루비콘강을 건너고 있는가? 도덕과 정의, 경제적 번영과 자유가 넘치는 사회로 비가역적으로 나아가고 있는가?

남호수 동서대 융합전자공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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