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암각화 바위 옆에서 어제의 벼루를 내일에 전하다
-울산시 무형문화재 제6호 벼루장 유길훈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 울산시 무형문화재 제6호 벼루장 유길훈.

‘울산의 쟁이들’은 ‘세상이 알아주지 않아도 그저 담담하게 그 길을 걸어가는 사람들’에 대한 기록이다. 울산을 기반으로 오랜 기간 전통문화 분야에 몰두하며 최고의 열정과 기량을 보여준 사람들을 인터뷰하고 그 생애와 기예를 소개한다.

6·25 전쟁에 이북 고향 떠나
진천서 벼루장 김인수옹 만나
수차례 전수과정 포기도 고민
꿈에 그린 벼룻돌 ‘언양록석’
반구대 암각화 인근서 찾아내
인근에 공방 내고 자리 잡아
전통 후대에 넘길 일만 남아
최근 아들 유은해씨 전수자로

울산시 울주군의 반구대 암각화 길목에는 ‘벼루공방’이라 적힌 작은 나무 팻말이 있다. 그리고 그 팻말을 따라 이어진 오솔길을 들어가면 수풀 사이로 울산시 무형문화재 제6호 벼루장 유길훈 장인의 벼루 공방이 호젓하게 놓여 있다.

1948년 평안북도 평양시 감북동에서 태어난 유길훈 장인은 6·25 전쟁이 발발하자 가족들과 함께 ‘유(劉)씨 집성촌’이라는 충청북도 괴산군 증평읍으로 피난을 오고, 결국 증평과 산 하나를 사이에 둔 진천에 정착하였다. 진천은 옛 문헌에도 기록된 상산자석(常山紫石) 벼루로 유명한 지역이었다. 또 마침 그의 옆집에는 당시 전국적으로 명성을 떨친 벼루장 김인수 옹이 살고 있었다. 이렇게 우연과 운명이 겹치며 유길훈 장인은 ‘향나무 장기알 세 쪽’이라는 전래동화 같은 이야기와 함께 벼루 인생을 시작했다.
 

▲ 유길훈 장인의 ‘언양록석 벼루공방’.

“선생님이 장기를 두시는데 향나무 자연목에다가 장기알을 새겨가지고 두시더라고. 특이한 장기알이구나 생각을 했는데 이래 보니까 병뚜껑이 세 개가 있어. ‘말(馬)’하고 ‘졸(卒)’하고 ‘상(象)’인가 이렇게 잃어버려서 병뚜껑으로 두시더라고. 다 공예 작품 같은 장기알인데 세 개만 그러니까 보기 싫길래 내가 굵기가 비슷한 걸로 연필 깎는 칼로다가 새겨서 섞어 놨어요.

그 이듬해 고등학교 졸업을 해가지고 사회 진출을 해야 되는데, 스승님이 너 이리로 좀 와봐. 작년에 너 장기알 만드는 거 보니까 손재주도 있고, 그러니까 내가 하는 거 배우면 안 되겠냐 하시더라고.”

▲ 벼루장 유길훈 장인의 아들 유은해 전수자.

그러나 전수의 길은 쉽지 않았다. 처음 들어선 벼루 작업장은 너무도 열악한 곳으로, 조그마한 괴짝과 숫돌, 무딘 도구, 가마니를 짠 바닥에 통풍도 되지 않는 두 평 남짓한 컴컴한 골방이었다.

하루 종일 앉아서 어깨로 미는 작업은 온몸을 무겁게 만들었고, 뼈는 마디마디 쑤셨으며, 어깨는 만질 수도 없을 만큼 부어올랐다.

그러나 몸의 고통보다도 그를 더욱 괴롭힌 것은 한참 혈기 왕성한 젊음이 이 작은 골방에 주저앉아 버렸다는 절망감이었다. 고민과 방황 속에 수차례 그만뒀다 다시 시작하기를 반복하던 중 내 손으로 온전한 벼루를 완성하는 성취감에 빠져들면서 그는 어느덧 누가 뭐라 해도 벼루 만드는 일을 그만둘 수 없는 벼루쟁이가 되었다.

▲ 유길훈 장인의 언양록석 ‘거북연’.

진천의 상산자석으로 벼루 인생을 시작하였지만 최고의 벼루를 만들고 싶다는 집념 속에 2000년 즈음 드디어 꿈에 그리던 벼룻돌을 언양의 반구대 암각화 근처에서 찾았다. 그리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이곳에 달려와 터를 잡았다.

“이제는 자신감 있게 이야기 하죠. 중국의 단계연도 좋지만 여기 돌도 그에 못지않다고. 먹도 잘 갈리고, 먹물도 맑고, 돌에서 먹물을 빨아들이지 않고 잘 머금고 있죠. 벼룻돌은 부드럽다고 좋은 게 아니라 잡석이 안 박힌 돌, 소리가 맑고, 또 풍화가 안 된 거. 풍화가 된 거는 보이지 않아도 실금이 가거나 해서 물이 막 새고 그러거든요. 벼루면이 판판하면 먹이 너무 잘 갈리고 울퉁불퉁하면 막 깨지고 그러기 때문에, 면이 고양이 혓바닥처럼 거칠거칠하면서도 일정해야 하는 거죠. 너무 강하면 미끄럽기만 하고 먹을 갈아주질 못해요. 적당히 부드럽고, 약간 질기면서, 입자가 고와야 되죠.”

▲ 유길훈 장인의 언양록석 ‘삼우연’.

지나치지도 넘치지도 않는 돌, 두드리면 맑은 소리가 나고, 잡석이 섞이지 않은 고운 돌, 거기에 따뜻하면서도 부드러운 느낌의 푸르른 빛까지. 유길훈 장인이 꿈에도 그리던 그 돌은 바로 ‘언양록석’이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들어선 이 길에서 지난 50여 년간 돌을 자르고 쪼고 밀고 다듬어왔다. 이제 와 돌아보니 그 인생은 그저 나만의 것이 아니다. 옛날 무명의 벼루 장인들이 제자에게 물려주고 또 물려주며 오늘날까지 면면히 내려온 벼루 만드는 기술이 자신을 통해 다음 세대로 이어진다. 자신은 그저 그 길고 긴 흐름 속에서 벼루의 맥을 잇기 위한 하나의 통로일 뿐이었다.

▲ 유길훈 장인의 언양록석 ‘매화연’.

“진천에서는 석공으로서 벼루를 제작하며 생업을 위해 활동했지만, 지금은 이 기술을 우리 전통문화의 역사에 올려놓고 후대에 넘겨줌으로써 내 역할이 끝나는 거라는 생각이 들어요. 내 몸에 있는 기술이 순전히 내 건 줄만 알았는데, 역사 속에서 흘러온 문화가 내 몸을 잠깐 거쳐 나가는 걸 깨닫게 됐죠.”

▲ 노경희 전문기자·울산대 국어국문학부 교수

그리고 이제는 아들이 이 길을 함께 걷는다. 어릴 적부터 아버지가 벼루 만드는 것을 지켜보고 자란 아들 유은해(1978년생) 전수자는 2018년에 정식으로 벼루 제작에 입문한 뒤 2019년 1월 전수장학생에 지정되었다.

그리고 얼마 전 개최된 ‘제23회 울산시 공예품대전’에 암각화와 고래, 대나무와 소나무, 매화 등을 새긴 ‘황토상감 문양벼루’를 출품하여 동상을 수상하는 등 한 걸음씩 벼루장의 길을 내딛고 있다. 이 고생길을 아들에게까지 물려주다니 이 무슨 대를 물린 팔자인가 싶다지만, 그렇게 말하는 장인의 얼굴에는 대견함과 고마움, 그리고 흐뭇함이 비친다. 오늘도 반구대 암각화 옆의 작은 공방에서는 벼루에 일생을 바치는 아버지와 아들이 돌을 다듬고 있다.

글= 노경희 전문기자·울산대 국어국문학부 교수 사진= 안순태 작가 표제= 서예가 김중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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