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과 동떨어진 허울뿐인 위로 대신

진심어린 공감담아 위로 건네보세요

▲ 송성환 마더스병원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40대 부부가 진료실을 찾았다. 아내는 불안했다. 남편은 아내를 위로했다.

“아이가 학교에 적응을 못 해요. 따돌림이라도 당할까 봐 불안해요.”

“괜찮아. 다 잘 될 거야.”

“남편은 영업직인데 많은 사람을 만나요. 코로나바이러스에 감염될까 봐 불안해요.”

“괜찮아. 안 걸려.”

남편의 위로는 다 잘 될 거라는 박카스 광고를 연상시켰다. 하지만 섣부른 위로는 박카스 한 병이 가진 효과에도 미치지 못한다. 아내는 남편을 보며 땅이 꺼질듯한 한숨을 내쉬었다.

남편은 마치 세상의 모든 이치를 깨달은 것처럼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었다. 남편은 분명 아내를 위로했다. 그런데 아내가 서운한 이유는 뭘까?

현실에 기반하지 않은 위로는 공감하지 못하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그건 안 하는 것보다 못하다. 공감하지 못할수록 위로는 쉽다. 도리어 공감을 할수록 위로를 건네는 것이 신중해진다.

예를 들어볼까? 자. 학교 폭력에 시달리다 자해를 시도한 학생을 보며 당신은 뭐라고 할 것인가?

“괜찮아. 다 잘 될 거야”

학생한테 뺨을 맞지 않은 것만으로도 감사해야 한다. 뭐가 다 잘되는데? 그가 처한 현실은 전과 다르지 않은데? 무슨 고통을 당했는지는 알고 그런 말을 하는가? 뭘 안다고 위로하고 동정하는가. 공감하지 못하는 상태에서 내뱉는 위로는 불 난 집에 기름 붓는 것과 같다.

위로 전에 반드시 공감 한 스푼 넣어 마음을 전달해야 한다. 물론 허울 뿐인 공감이 아니라 진심 어린 공감이어야 한다. 위로 전에 공감을 전한다면 다음처럼 된다.

“친구인 줄 알았던 아이에게 괴롭힘을 당하면서 얼마나 힘들었을까. 세상이 지옥처럼 느껴졌을 것 같다. 나는 네가 다시 일어설 수 있도록 돕고 싶어. 괜찮아. 다 잘 될 거야.”

그럼 서두에 제시된 남편 또한 공감 한 스푼 넣어서 다시 말해보자. 어떻게 달라질까?

“아이가 적응을 잘하지 못할까 봐 불안했구나. 그래. 사실 나도 걱정된다. 그래도 우리가 도와주면 잘 적응할 거야. 괜찮아. 다 잘 될 거야.”

“내가 많은 사람을 만날수록 코로나에 걸릴 가능성이 크지. 맞아. 나도 불안해. 마스크를 잘 쓰고 다닐게. 괜찮아. 안 걸려.”

공감이 선행되어야 한다. 공감 이후에 위로가 주어지면 배우자의 마음은 더욱더 따스해진다. 어설픈 위로는 배우자의 입을 봉인시킨다. 다 괜찮다는 데 무슨 말을 하고 싶겠는가. 배우자는 위로보다 공감을 원한다.

송성환 마더스병원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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