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한복 장인 이영숙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 대한민국 한복 명장 이영숙 장인.

‘울산의 쟁이들’은 ‘세상이 알아주지 않아도 그저 담담하게 그 길을 걸어가는 사람들’에 대한 기록이다. 울산을 기반으로 오랜 기간 전통문화 분야에 몰두하며 최고의 열정과 기량을 보여준 사람들을 인터뷰하고 그 생애와 기예를 소개한다.

4대에 걸친 한복 명장으로 울산 최초로 ‘백년소공인’ 선정
옛 사람들 삶이 담긴 전통복식 다시 살리는 일에 앞장서며
조선시대 왕실 복장·전통혼례복 등 수백 벌 복원하고 재현
옷에 딸린 노리개·화관도 원재료 그대로 만들기 위해 노력
2010년도에는 한복전수관 열어 후학 양성에도 힘쓰고 있어

할머니와 어머니로부터 배우고 이제 딸에게까지 알려주는, 무려 4대에 걸친 바느질 솜씨를 전하는 대한민국 한복 명장 이영숙 장인. 그의 이름 앞에는 여러 타이틀이 붙는다. 명장ㆍ신지식인ㆍ산업현장 교수, 여기에 지난달에는 그 장인 정신과 숙련 기술을 인정받아 울산 최초로 ‘백년소공인’에 선정됐다. 이렇게 화려한 이름들 때문에 그의 한복 인생 또한 보통 사람들의 삶과는 전혀 다를 것 같지만, 사실 장인에게 바느질쟁이의 삶은 너무도 당연하고 자연스럽고 숨 쉬는 것과 마찬가지의 그냥 하는 일일 뿐이다.

▲ 자투리 천으로 만든 각종 공예품들.

“어릴 때는 울산의 이씨 고가가 있는 동네에서 태어났으니까, 할머니나 어머니가 바느질을 하면 맨날 거기 가서 동무들이랑 놀고, 옷을 하려면 그때는 원단을 보내 와 그걸로 바느질 하고 보자기에 싸가 배달하는 걸 제가 주로 했었죠. 그러니까 아무개 댁에 갖다 주라고 하면 다녀오고, 그러면서 우리 집은 평생 이리 사는 집인가 보다 했죠. 늘 바느질을 보고 자라왔기 때문에 (바느질에) 별로 거부감이 없었어요, 뭐 하고 놀 때도 바느질 도구들을 갖고 놀았고 화로나 이런 것들은 늘 옆에 있고. 그때는 이런 번듯한 가게도 아니었거든요. 담벼락에 ‘한복’ 이렇게 붙여 가 그냥 집에서 하는 거죠.”

▲ 다양한 형태의 축소 한복 저고리들.

이영숙 장인은 울주군 웅촌면 석천리 학성이씨의 터전에서 나고 자랐다. 어머니 엄귀선 여사는 16살의 어린 나이에 시집 와서 시어머니 이석계 여사에게 바느질과 길쌈을 배웠다. 장인은 어린 시절부터 눈만 뜨면 할머니와 어머니가 바느질하는 모습을 쳐다보며 자라왔다. 그러나 장인의 어머니는 자기 딸까지 힘든 한복일을 하는 것이 너무도 싫어 장인에게 공부를 권했고, 결국 장인은 바느질과 전혀 상관없는 부산 시청 공무원의 인생을 걷기도 했다. 그러나 그 시절조차 항상 손에서 수틀을 놓지 않았다.

▲ ‘한국의상예맥’의 한복과 옷감.

같은 시청 공무원이던 남편을 만나 결혼하면서 직장을 그만두고, 곧 평생 삯바느질로 생계를 이어 오신 어머니를 도와 본격적으로 한복 만드는 일에 뛰어 들었다. 그때가 1975년 즈음이었으니 이후 오늘날까지 50년 가까이 침선장 외길 인생을 살아 온 것이다. 한 벌의 옷이 완성되기까지 한 땀 한 땀 끝도 없이 이어지는 바느질일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고개를 내젓지만, 장인에게는 그 모든 과정들이 그저 너무 재밌고 하고 싶은 일이다.

“이걸 내가 왜 해야 해, 이러면 자기가 가장 불행하잖아요. 내가 하고 싶은 걸 하니까 너무너무 재밌는 거야. 돈은 좀 안되지만. 나는 손이 너무 무디고 아무것도 못할 꺼라 생각했는데 결국 해냈다는 성취감과 굉장한 만족감이 있어요. 내 딸이 항상 엄마는 왜 다시 태어나도 이걸 하겠다고 하냐고, 지겹지도 않느냐, 돈도 안 되고, 밤잠도 못 자는데. 그러면 저는 전생에 이 일이 남아 있음 더 좋고 아니면 다음 생에서도 이걸 다시 할 꺼다 하는 거죠.”

장인은 옛 사람들의 삶이 담긴 전통 복식을 오늘 다시 살리는 일에 열정적이다. 지난 수십 년간 조선 시대 왕실 복장에서 사대부와 평민들의 일상복과 의례복, 전통혼례복 등을 수백 벌 복원하고 재현해왔다. 학성이씨 묘에서 출토된 ‘면포솜장옷’과 ‘난봉화문단겹장옷’을 재현하여 울산박물관에 기증하기도 하였다. 대대로 물려 줄 수 있는 옷을 만들고자 문헌을 뒤져 고증하고, 박물관을 다니며 실물을 보고, 자수 하나도 허투로 두는 일 없이 온 정성을 다해 한 벌 씩 만들어왔다. 옷에 딸린 노리개, 화관, 장신구 등도 원재료 그대로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내가 입는 옷은 아무래도 좋지만 내가 만드는 옷들은 터럭 하나도 가짜가 아닌 진짜여야만 했다. 그것은 옛 사람들이 만든 옷을 보면 볼수록 그들에게 감탄하고 그들을 존경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었다.

“똑같은 한글도 그 글씨가 사람마다 다 다르잖아요. 바느질도 사람마다 전부 다릅니다. 옛날의 바느질은, 출토 유물들을 보면 진짜 이게 사람의 손으로 했을까 싶을 정도로 너무너무 섬세한 솜씨가 있어요. 그때는 놀 것도 할 것도 전혀 없으니까 밤새도록 아랫목에 앉아 바느질만 한 거죠. 예전 사람들의 재간은 파면 팔수록 재미있어요. ‘전통폭’이 있는데 옷 패턴을 거기에 딱 맞게 해요, 그때는 천도 직접 짜서 만들었기 때문에 허실이 없어야 해요. 잘려 나가 버려지는 게 없도록 꽉 짜이게 만든 걸 보면, 볼수록 대단한 분들이에요. 천이 조금이라도 남으면 조각보로 만들잖아요. 버리는 게 절대 없어요. 요즘은 천이 귀한 줄을 모르죠. 그래서 저는 항상 쓰레기통을 뒤져 쓸 수 있는 천들을 꺼내요. 공예품도 만들고 그걸 모아 조각을 해 놓으면 그렇게 멋있고 예쁠 수가 없어요.”

▲ 글= 노경희 전문기자·울산대 국어국문학부 교수

장인은 1988년 고향 울산으로 돌아온 뒤 내내 신정동 공업탑 근처에서 한복을 만들고 가르쳐왔다. ‘이영숙 한국의상예맥’이 그의 삶터이자 일터이다. 2010년도에는 한복전수관을 열어 후학 양성에도 힘쓰고 있다. 옷 한 벌 완성할 때마다 느껴 왔던 그 성취감과 만족감을 제자들도 알았으면 좋겠다.

장인이 이렇게 자신의 일에 모든 열정을 바칠 수 있는 것은, 딸 이정현 씨가 자신이 그랬듯이 어머니와 함께 이 길을 걷고 있기 때문이다. 4대의 솜씨를 이어 받은 딸은 누구보다 야무지게 한복을 만들지만, 대학에서 한국무용을 전공하였기에 만드는 것 이상으로 한복의 맵시를 잘 알고 입는다. 장인의 어머니는 늘 딸이 힘든 일 하는 게 싫다 하셨지만, 사실은 장인이 옆에 있어 더없이 행복하셨을 것이다, 그것은 이제 그 누구보다 장인이 잘 안다. 할머니에게서 며느리로, 딸로, 손녀로 우리네 여인들이 물려 준 것은 ‘솜씨’가 아니라 사실은 ‘사랑’이었다.

글= 노경희 전문기자·울산대 국어국문학부 교수 사진= 안순태 작가 표제= 서예가 김중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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