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성 가진 특유의 문화 융합코드로
창의적으로 사회상 발전시켜온 한국
취향껏 먹는 밥상문화가 원동력 아닐까

▲ 전상귀 법무법인현재 대표변호사

테스 형, 누구나 다 아는 노장 가수의 공연과 발언이 화제이다. 미스트롯과 미스터트롯 프로그램에 이어 트롯이 새로운 모습으로 대중들과 호흡하고 있다. 영웅이니 가인이니 하면서 인기를 독차지하고 있으니 말이다. 코로나 시대의 변화라고 보기에는 저변이 만만치 않다. 한국 트로트에 근원에 대해 찾아보니 미국의 폭스트롯이라는 설과 일본의 엔카라는 설이 있다. 어쨌거나 일제강점기에 일본인들의 음악이 수입된 것임에는 틀림없다. 해방 후 왜색이 짙다고 건전가요를 권장하며 속칭 ‘뽕짝’ 운운하며 경원시 한 적도 있다. 물론 엔카가 들어오기 전에도 이 땅에는 고유의 음악이 울려 퍼졌었다.

하지만 신문물의 달콤한 유혹을 어찌 이길 수 있으랴. 엔카의 영향으로 트롯이 한국에 정착했지만 일본가요와는 완전히 다른 존중받아야 할 소중한 장르이다. 빌보드 1위 BTS의 ‘다이나마이트’와 오스카상의 영화 ‘기생충’이 세계적으로 영향력을 펼쳐 나가는 동안 새로운 감성의 트롯이 국내에서 퍼진 것도 평가받아야 한다. 100년 전 상하이에서 영화가 촬영되던 시절 우리는 마당에 거적을 깔고 육자배기를 구경하지 않았던가. 일본의 간편식인 라면을 도입하였지만 이제는 한국의 라면이 세계적인 지위를 차지하고, 역으로 어떤 브랜드의 커피점은 대형 빌딩을 지어 고객을 맞이 한다.

30년 전쯤 삼성그룹의 모 임원이 일본의 소니 텔레비전 앞에서 언제 우리는 저 기술을 따라갈까 한숨짓는 것을 목격하였다. 한국의 자동차 완성회사가 자존심을 구기고 미국의 자동차를 팔기도 했다. 지금은 어떤가. 삼성전자는 이제 일본 전자업체를 경쟁상대로 보지 않는다.

문화와 기술을 도입함에 그치지 않고 이를 발전시키는 힘은 어디에서 오는가. 비빔밥으로 문화융합을 설명하는 분도 있다. 다 비벼서 하나의 음식이 되는 문화적인 개방성. 일본식의 계란말이든 중국의 튀긴 음식이든 된장이나 고추장에 참기름 넣고 비빈다. 그러면 그것은 한국 고유의 음식인 비빔밥이니 수긍이 간다. 이것저것 휴대전화에 구겨 넣은 스티브잡스와 뭐가 다른가. 단기간에 한국의 사회, 경제, 문화의 충격의 밀도가 높기 때문이라고 짚기도 한다.

100년 동안 양반상놈의 시대를 정리하지도 못한 채, 한글을 쓰면 내란죄(최현배 선생은 치안유지법의 내란죄로 실형을 살았다고 한다)였던 시절 식민지 피지배자(2등 국민이었던 열등감에 수준 낮은 욕설문화가 사라진 것은 아니다), 동족상잔의 전쟁, 빈국에 덮친 자연재해, 빨갱이니 파랭이니 이념분쟁, 빈부간의 갈등 시대, 세대간 공정성 문제까지 압축되어 있는 국가. 그렇다고 한국의 고유성은 없는가? 인도에서 거의 믿어지지 않는 불교의 문화가 수천년 지속되고 있고, 한국적 기독교 문화의 특수성이 있으며, 중국에서 도교에 비하여 소수인 유교가 역시 천년 넘게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이를 두고 어찌 한국인의 독자성이 없다고 하겠는가. 번자체를 쓰는 한국의 한자는 약자를 섞어 쓰는 일본이나 간자체인 중국과는 사뭇 다르다. 받아들이되 원형유지와 융합대상을 구별한다는 뜻이다.

필자는 밥상 위의 창의적 행동을 주목한다. 우리 밥상은 서양식, 중국식, 일본식과는 달리 구이기구, 밥, 국과 반찬을 늘어 놓는다. 그리고 젓가락과 숟가락을 이용하여 자기의 취향대로, 지지고, 굽고, 말고, 비비고, 끓이고, 쌈 싸는 것 모두가 자유! 술을 먹을 때도 섞어서 먹는 것을 탓하지 않는다. 우리만큼 소위 폭탄주를 다양하게 섞고 흔들어 마시는 곳이 있을까. 밥상 위에서 맘 내키는 대로 즐기면 된다. 밥상 위의 자유분방이 한국문화의 창의성을 키우는 것은 아닐까? 10월은 문화의 달. 우리가 밥상에서 얼마나 기상천외한 퍼포먼스를 하는지 살펴보라. 우연히 이루어진 문화가 있겠는가. 밥상의 배부른 소크라테스를 상상해 본다.

전상귀 법무법인현재 대표변호사

 

저작권자 © 경상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