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라는 단어 없었던 트럼프 행동
지지 잃었고 결국 자신도 손해 입어
의미 있는 선의는 봉사·희생이 기반

▲ 장연우 UNIST 디자인·공학 융합전문대학원 교수

대선결과를 믿지않는 고집불통 악동 트럼프는 세상 최고 화제다. 사상 초유 재검표 소송과 투표조작 진위와는 별개로 그의 주장은 좀처럼 공감을 얻지못하는 듯하다. 심지어 세상 언론 보도, 미디어, SNS에는 트럼프를 희화·조롱하는 내용들이 넘쳐난다. 독선 때문이다. 자신의 판단이 무조건 옳다는 자기확증이 다수에게 거부감을 일으켰다. 재임기간 내내 인종편견적 호불호를 거리낌 없이 내뱉아 원성도 크다. 특정지역, 특정계층에 편향된 정책은 덤이요, 대선클레임까지, 지금 트럼프 임기말의 미국은 국가분열직전이다. 여기까진 미국내 일. 대외적으론 미국 최우선 행보로 국제사회의 지지를 잃었다. 파리기후협약 탈퇴나 한국, 일본, 독일에 주둔하는 미군의 유지분담금을 올리려는 것처럼 각종 국제기구와 조약에 자국 손익만 따져 행동한 결과다. 세계를 리드하는 미국이 책임 큰 역할을 거부하니 여러 이슈에서 많은 나라들로부터 미국에 대한 지지를 계속 잃고 있다. 미국 역대 대통령과 달라도 너무 다른 트럼프의 처사에는 ‘함께’라는 단어가 없다. 이처럼 자기만 위하는 행동은 지지를 잃고 부메랑이 되어 결국 자신도 손해를 입게 된다.

반대로, ‘함께’가 들어 있는 선의는 언제나 공감과 지지를 얻는다. 종교나 이해충돌로 다투는 나라들이, 유엔과 민간단체를 통한 환경, 빈곤, 질병, 재난 등 지구적 문제 해결에는 예외적으로 서로 협력한다. ‘모두 함께’라는 선의 때문이다. COVID19 팬데믹에 전세계가 함께 살길을 모색중인 현재도 좋은 예다. 우리에겐 더 가까운 경험이 있다. 2016년말 권위정권이 무너진 것은 국민적 분노가 촛불이라는 시각화된 공감으로 표현된 때문이다. 미디어에 수시로 발표되는 대통령이나 각 정당의 지지율은 말그대로 대상에 대한 공감과 지지다. 자동차부터 제품, 식품, 영화, 책까지 ‘베스트셀러’의 의미는 ‘최고 인기’라는 공감과 지지의 결과다.

디자인도 똑같다. 나혼자 마음에 드는, 내 마음대로 만든 디자인은 사실 디자인이 아니라 예술행위(?)에 가깝다. 철저히 자신만의 표현, 고유성을 중요한 가치로 보는 현대미술과 달리 디자인은 반드시 사용자의 공감과 지지가 필요한 분야다. 디자인은 디자이너의 아이디어부터 여러 단계 평가를 거쳐 공감과 지지를 획득한 안으로 다듬어진다. 필자가 자동차기업 재직시절 디자인개발 프로젝트 때 우선시 했던 척도는 ‘이 디자인이 잘 받아들여질 수 있는가?’였다. 즉, 짧게는 디자인팀 내 동료디자이너들로부터, 길게는 전세계 대중에게, 더 많은 공감과 지지를 얻는 디자인이 좋은 디자인이라는 뜻이다. 자동차는 작은 일례일뿐. 스마트폰, 패션, 머리스타일은 물론 음악과 인스타 맛집의 음식 한접시까지도 생각해보면 세상 만물이 같은 이치다.

나 혼자사는 세상이 아니다. 함께 사는 세상에서 의미 있는 가치는 공감과 지지로 만들어진다. 나의 연구나 학문적 발견, 나의 발표와 성과가 다수의 공감과 지지를 얻지 못하면 아의리 훌륭한들 ‘도로아미타불’. 그래서 우리는 자신의 생각을 논문, 학회, 컨퍼런스, 책, 다양한 미디어 채널로 점점 더 많이 소통한다.

여기서 팁하나! ‘공감과 지지’를 얻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바로 ‘함께하는 선의’ 앞에서 무조건이다. 크든 작든 이타적 봉사와 희생은 누구나 지지한다. 대가를 바라지 않는 ‘선의’에 ‘엄지척’. 공감 않는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어느 SNS에 올라온 안타까운 사연에 온국민이 함께 아파하는 모습, 연말연시의 따뜻한 마음들, 코로나 혼란 속 의료진 노고에 대한 감사뿐일까? 함께할 때 비로소 멋진 세상이다. 그만큼 중요한 ‘함께’ 라는 인사이트, Together라는 통찰력. 우리 삶이라는 말처럼, 다같이 함께 하기 위해 꼭 필요하다.

장연우 UNIST 디자인·공학 융합전문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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