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세재 글로벌나눔인성교육원 원장

우리 부모 세대는 어려서 힘들고 배고픈 시절을 겪으셨다.

일제강점기 시절 먹을 것이 없어서 나무껍질을 벗겨 먹고 입에 곡기 냄새만 채워도 족할 정도였다. 그랬기에 가난을 자손들에게 물려주고 싶지 않았다. ‘너는 잘 살아야한다’고 노래를 부르셨다.

칭기즈칸은 달랐다. 칭기즈칸도 배가 고팠고 누구보다 큰 어려움을 당했지만, 혼란과 무법천지의 시대를 살았던 그는 멋진 말을 남겼다.

“적(敵)은 내 안에 있었다. 나를 극복하는 그 순간, 나는 칭기즈칸이 되었다.” 극복해야 할 내 안의 적(敵)은 무엇인가? 나는 그것이 두려움이라고 생각한다. 사람들은 두려움을 이길 수 없다.

작가 친기즈 아이뜨마또프는 그의 저서 <백년보다 긴 하루>에서 키르기스스탄의 츄안츄안 부족이 적을 잡아서 망꾸르트로 만드는 이야기를 소개하고 있다.

강력한 태양 볕에 사람을 묶어두고, 머리털을 밀고, 암낙타의 유방을 뒤집어 씌워 두면, 태양의 열기에 낙타의 유방 가죽이 쪼그라들면서 머리를 압박해 많은 사람이 죽고, 살아남더라도 머리카락이 자라면서 낙타의 유방 가죽을 뚫고 나올 때 그 고통이 너무 커서 모든 기억을 잃어버린다고 한다.

그렇게 만들어진 노예는 다른 노예들보다 훨씬 비싼 값에 팔렸다. 모든 기억을 잊고 주인이 시키는 대로 사는 종, 망꾸르트가 됐기 때문이다.

그런 망꾸르트에게 가장 큰 두려움은 다시 머리털이 밀리고 뜨거운 태양 아래 낙타의 유방 가죽을 뒤집어쓰는 것이다. 그래서 ‘그렇게 행동하면 다시 암낙타의 유방을 뒤집어 씌운다’고 하면 망꾸르트는 기겁을 하면서 주인에게 고분고분한 종이 된다. 그 고통이 얼마나 컸기에 자신의 모든 의지를 포기했을까? 두려움은 인간을 약하게 만든다.

두려움은 나를 결박한 채 끌고 다니는 보이지 않는 적이다. 권력을 잃을까 두려워서 정적을 제거하고, 전쟁이 두려워서 수많은 무기를 만든다. 내가 잘못될까 두려워서 온갖 거짓말을 하기도 하고, 내 잘못이 드러날까 두려워서 살인을 저지르기도 한다. 가난이 두려워서 도둑질을 하거나 강도가 되기도 한다. 가난이나 무지함을 이기는 사람은 있어도 자기 속의 두려움을 이기는 사람은 없다. 사람들은 두려움의 종으로 산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가장 존경하는 사람 중에 다윗 왕이 있다. 이스라엘의 국기에 그려진 별을 다윗의 별이라고 한다.

그는 원수인 사울 왕 앞에서 아무 무장 없이 수금을 들고 서 있었다. 창을 든 사울과 수금을 든 다윗은 대조된다. 왕이지만 대적이 자기를 언제 죽일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창을 곁에 두고도 마음의 쉼이 없는 사울은 오늘날 현대인의 모습이 아닌가? 창이 아닌 수금을 들고도 대적을 용서하고 살려주는 다윗의 마음은 우리가 나가야 될 방향이 아닌가?

오늘날 우리는 너무나 많은 것을 가지고도 불안해한다. 위대한 우리의 선조들은 보조키가 달린 철문도 아닌 나무 창살문에 창호지를 붙이고도 편히 잠이 들었다.

암에 걸린 부인이 있었다. 죽음이 턱밑에까지 따라와서 앉으나 서나 죽음만 생각했다. 그런데 그녀를 완전히 바꾼 일이 있었다. 바로 마인드 교수님과의 대화이다. “부인은 지금까지 암을 계속 이겨왔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암세포가 하루에도 수 백 개씩 생기지만 지금까지 암에 걸리지 않은 것은 NK세포가 있어서 암세포를 이겨주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한 번 진 것으로 다시는 암을 못 이긴다고 생각하지 마시고, 다시 암을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세요.” 그 말이 큰 힘이 되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지금까지 병을 이겨왔다.

우리 몸속의 NK세포가 일을 할 수 있도록 믿음을 가지고 편안해 한다면, 우리의 삶은 또 다시 암을 이기고 병을 이길 수 있다. 가난보다 무서운 두려움, 병보다 무서운 두려움, 형편보다 더 무서운 두려움에 잡히면 사람은 생각의 폭이 좁아지고 극단적으로 치닫게 된다.

부담을 뛰어넘어 즐겨보는 것은 어떤가? 몰려오는 파도를 겁내지만 말고 윈드서핑이라도 하듯이, 인생의 파도를 즐기는 법을 배운다면, 밀려오는 거친 파도가 즐겁지 않겠는가?

오세재 글로벌나눔인성교육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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