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 장 인 물
하 잔
아 토
새 나
엄 마 : 하잔의 엄마
아 빠 : 하잔의 아빠

◆장 소
초록빛 잔디밭이 펼쳐져 있고 저 너머 칙칙한 회색도시가 얼핏 보인다.

◆무 대
초록빛 조명으로 잔디밭을 표현하고 뒤쪽으로는 회색빛 조명이 들어와 도시임을 알려준다.

상자 위에 누워 눈을 감고 있는 아토. 이때 길을 잃은 듯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걸어오는 하잔은 상자에 누워있는 아토를 발견하고 가까이 간다. 하잔이 걸을 때마다 주머니에 차고 다니는 열쇠 꾸러미로 인해 짤랑 짤랑 소리가 들린다. 열쇠는 대략 5-6개 되어 보인다. 하잔은 아토 앞에서 말을 건다.

하잔 : (머뭇거리며) 혹시 여기가 어디야? 내가 지금 길을 잃어버려서… 집으로 돌아 가야 하거든.

하잔의 물음에 아토는 이해를 못했다는 표정으로 쳐다본다. 당황한 듯 서 있는 하잔을 아토가 물끄러미 바라본다. 하잔은 어색하게 자신의 주머니에 걸려있는 열쇠꾸러미를 손으로 만진다.

아토는 시선을 거두며 자신의 옆자리를 툭툭 친다.

아토 : 여기 앉아.

머뭇거리다 하잔은 주머니에서 구겨진 손수건을 꺼내 상자 위에 펼친 뒤 앉는다.

아토 : (손으로 열쇠를 가리키며) 그 열쇠들은 뭐야?

하잔 : 집 열쇠. (소중하단 듯이 손에 꼭 쥐고) 제일 중요한 거지. 집을 지켜주니까. 그리고 또 이게 없으면 집에 들어갈 수 없고…

아토 : (고개를 저으며 한숨을 쉬고는) 제일 피곤하겠네. 그런 쇳덩어리를 항상 써야 하니까.

하잔은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는다. 잠깐의 정적. 이내 다른 주제로 돌려버리는 하잔.

하잔 : 뭐 하고 있었어?

아토 : 그냥 아무것도.

하잔 : 상자 위에서?

아토 : 여기는 내 방이야.

하잔 : 상자가?

아토 : 오늘은 날이 좋아서 상자를 접고 그 위에 앉아 쉬는 거고. 비가 오거나 날이 추우면 이제 상자 안에 들어가서 쉬는 거지.

하잔 : (표정이 묘하게 일그러지며) 장난치지 마.

아토 : 무엇이든 방이 될 수 있잖아.

하잔 : 집이 없구나?

아토 : 있어.

하잔 : 어디에?

아토 : 가족 말이야.

하잔 : (어이없다는 듯) 아니 살고 있는 장소를 물어본 거야.

아토 : 그런 게 중요한 건 아니잖아.

하잔 : 그럼 뭐가 중요한데? (하잔을 가만히 쳐다보는 아토를 보며) 아직도 주소 하나 못 외우고 다녀서 어쩌려고.

아토 : 왜 알아야 하는데?

하잔 : (아토가 답답한지 땅을 발로 구르며) 그러면 집을 찾아갈 수가 없잖아!

아토 : 집을 왜 찾아가?

하잔 : 바보야. 그러면 집 없이 어디서 지낼래?

▲ 일러스트·표제=윤은숙

여기랑은 전혀 다르지. 편하지도 않고. 
무엇보다 칙칙하잖아. 사람들도 이상하고.
뭔가를 잃어버린 것 마냥 눈에 초점이 없어. 
뭐가 중요한 지도 모르는 것 같고. 
엉뚱한 거에 미쳐 있달까.

뭔가 이상함을 느낀 아토가 다시 말하려는 듯 입을 열지만 이때 들려오는 새나의 목소리에 묻힌다. 뒤이어 새나가 걸어 들어온다. 여러 크기에 상자들을 들고 있다.

새나 : (큰 목소리로) 상자 사세요! 상자 사세요! 단돈 5000원이면 넓은 방을 얻을 수 있습니다!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말을 거는 새나. 관객에게는 사람들이 보이지 않는다. 새나는 상자 보실래요? 상자 필요하지 않으세요? 를 반복하며 몇 번 물어보다 포기한다. 주변을 둘러보다 멀리 앉아있는 아토와 하잔을 발견하고 다가간다.

새나 : (아토를 보고 반가워하며) 여기 있었네! 잘 지냈어? (아토 옆에 있는 하잔을 보곤) 옆엔 누구야? 처음 보는 얼굴이네.

아토 : 아 그러고 보니 이름도 몰랐네. 나도 오늘 처음 만났거든.

하잔 : 하잔이야. 내 이름.

새나 : 안녕. 난 새나. 그리고 언제 만났는지는 모르겠지만 네 옆에 있는 애는 아토.

아토 : 길을 잃어버렸대.

하잔 : (새나를 보며) 혹시 여기가 어딘지 알아?

새나 : 흐음… (아토를 쳐다보며) 여기가 어디지?

아토가 새나를 보며 어깨를 으쓱인다.

새나 사실 그런 건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어. (갖고 있던 상자를 살짝 위로 올리며) 상자 하나 살래?

웃으며 상자를 흔들어 보이는 새나를 보고 짜증을 내는 하잔.

하잔 : 이런 건 필요 없어.

아토 : (새나에게 작게) 저것보다 더 큰 상자에서 살고 있나봐.

아토의 말이 들렸는지 한숨을 쉬는 하잔.

새나 : 그러는 너야 말로 어디서 왔는데?

하잔 : 나는 저기. (도시를 가리킨다)

새나 : 아 저기? (말이 끝남과 동시에 상자 하나를 바닥에 두고 둘 앞에 앉는다) 꽤 복잡한 데서 왔구나?

하잔 : …밖이 시끄럽긴 해.

아토 : 시끄러우면 머리 아파. (도시를 떠올리다 이내 몸을 떨며) 시끄러운 거랑 활기 넘치는 거랑 다르지. 저긴 그냥 시끄럽고 정신없어 보여.

새나 : 여기랑은 전혀 다르지. 편하지도 않고. 무엇보다 칙칙하잖아.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속삭이듯) 사람들도 이상하고.

아토 : 사람들은 왜?

새나 : 뭔가를 잃어버린 것 마냥 눈에 초점이 없어. (골똘히 생각하다가) 뭐가 중요한 지도 모르는 것 같고. 엉뚱한 거에 미쳐 있달까.

아토 : 저번에 네가 얘기했던 것 같은데?

새나 : 맞아. 요즘 부쩍 상자가 잘 팔린다고 얘기하면서 말했었지.

아토 : 요즘도 잘 팔려?

새나 : 응. 나날이.

아토 : 그러면 이제 자리 잡기가 힘들 수도 있겠는데. (잔디밭을 훑어본다)

새나 : (손사래를 치며) 그 정도는 아니고. 그래도 사람이 많아지면 지금처럼 조용하진 않겠지만 북적이는 맛도 있을 거야.

아토 : (상상하며) 그치… (조용히 듣고 있던 하잔에게 시선을 돌리며) 네가 얘기해봐.

하잔 : 뭘?

아토 : 네가 살고 있는 곳.

하잔 : 그냥… (잠시 생각하다) 조용해.

아토 : 조용하다고?

새나 : (고개를 갸웃거리며) 그럴 리가 없는데. 내가 잠깐 지나칠 때마다 조용하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는 걸.

아토 : 네가 간 곳만 그런 거 아냐 그러면? (갸웃거리며) 아냐. 가끔 거기서 오는 사 람들 바쁘고 정신없어 보였어. (주변을 살피며 몸을 낮춰 둘에게 가까이 오라고 손짓한다) 얼마 전에 새로 온 사람이 저기서 왔다고 했거든. 근데 어떻게 쉬는 지를 모르더라고.

하잔 : (조금 다급하게) 밖은, (이내 다시 차분해지며) 밖은 시끄럽지만 안은 나름 조용해. 모두가 다 그런 건 아니잖아? (어색한 웃음을 보인다)

아토 : 안? 안이면 네 집?

하잔 : 응.

새나 : 혼자 살아?

하잔 : 아니? 꼭 밖이 시끄럽다고 안까지 시끄러워야 하나.

새나 : 그건 그렇지. 그래도 늘 조용하진 않을 거 아냐. 가족끼리 모여서 밥을 먹을 때 나 쉴 때나… 뭐 이럴 때는 말소리가 끊임없지. 집은 그런 거 아니겠어?

아무 말 없이 어색하게 고개만 끄덕이는 하잔. 정적. 하잔의 시선이 새나의 상자들로 향한다.

새나는 그런 하잔을 보고 씩 웃는다.

새나 : 작은 건 1000원, 중간 크기는 3000원, 큰 건 5000원이야.

하잔 : (갑자기 들리는 새나의 목소리에 놀라) 응? (무슨 의미인지 알고) 아 그렇구나.

새나 : (상자를 주먹으로 두들기고) 나름 튼튼하고 (손으로 쓸어보고) 코팅이 되어 있어서 물이 묻어도 금방 젖지 않아. 아마 15일은 끄떡없을 걸? 색깔은 갈색이랑 지금은 없지만 흰색도 있어. 흰색이 화사하니 예뻐서 잘 나가. 근데 금방 까매져서 여분으로 하나 더 사는 게 좋지.

하잔 : (주저하며) …괜찮아?

새나 : 어떤 게?

하잔 : 상자에서 지내는 거.

아토 : 안 좋을 건 없지. 어디서 지내는 지가 중요한 게 아니니까.

하잔 : 그러면 뭐가 중요한데?

새나 : 공간 말고도 중요한 건 정말 많잖아.

잠시 생각에 빠지는 하잔. 아토와 새나는 하잔을 아무 말없이 본다. 하잔은 꽤 오랫동안 생각한다. 새나, 자리에서 일어나 옷을 한 번 툭툭 턴다.

새나 : 이제 가봐야겠다. (손목에 시계가 없지만 왼쪽 손목을 들어 시간을 보는 척하며) 시간이 많이 지났네. 그래도 다행히 아직 몇 개는 더 팔 수 있겠어.

아토 : 다음에도 또 얘기하자. 아마 일주일 뒤에 우리도 상자 사야할 것 같아. 그때 한번 들려.

새나 : 그럴게. (아직도 멍한 하잔에게) 다음에도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때는 네 얘기 좀 더 해줘.

하잔은 새나를 올려다보며 웃는 걸로 인사를 대신한다.

바닥에 있던 상자를 주워 나머지 상자들과 함께 한쪽 팔에 끼운 뒤 나머지 손으로 둘에게 손 인사를 한다.

그리고 뒤를 돌아 걸어간다.

새나 : (큰 소리로) 상자 보세요! 작은 건 1000원, 중간은 3000원, 큰 건 5000원이에요!

사람들에게 아까처럼 말을 걸며 상자를 파는 새나.

왔던 길 반대 방향으로 걸어간다. 새나의 상자 파는 소리도 점점 작아지다 들리지 않는다.

아토와 하잔은 새나가 간 방향을 바라본다. 그러다 하잔은 시선을 돌려 아토를 쳐다본다.

하잔 : 새나가 했던 말… (사이) 정말 그렇게 생각해?

아토 : 어떤 거?

하잔 : 공간이 다가 아니라는 거.

아토 : (잠시 고민하다) 사실 어디든 뭐가 중요해. 같이 있는 사람이 중요하고 소중한 거잖아. 그걸 잊고 장소에만 연연하기엔 너무 삭막할 거 같지 않아? (고개를 돌려 도시를 쳐다본다) 저긴 색이 사라졌어.

하잔 :같이 있는 사람… (사이) 근데 정작 그 사람들이 모를 수도 있잖아.

아토 : 뭘?

하잔 : 사람이 전부라는 걸. (조심스럽게) 그럴 때는 어떻게 해야 하는데?

아토 : 말해줘야지. 더 늦기 전에. 늦게 알아버릴수록 더 공허할거야.

하잔 : 너는 아무것도 모르는 구나. (하잔의 고개가 숙여진다)

아토, 하잔이 말을 할 때까지 가만히 기다려준다.

하잔 : 그걸 몰라서 말하지 못하는 사람은 없을 걸. 그냥 잠깐 미뤄두는 거야.

아토 : 틀렸어. 앞뒤가 안 맞잖아. 아는데 왜 미뤄. 그건 못하는 게 아니라 안하는 거야. 두려워서. (사이) 아니면 정말 모르거나.

하잔 : (말에 힘이 들어가며) 알아. (아토를 살짝 노려보며) 아는데 못하는 거야.

아토 : 지금 너를 보면 안하는 거 같은데? (팔짱을 끼고) 내 말이 틀려?

하잔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씩씩대며 노려본다.

아토 : (꼈던 팔짱을 풀며 한숨을 쉰다) 그러니까 말하라고. 네 부모님한테.

하잔 : (당황한 듯) 알았어?

아토 : 모를 거라 생각했어? 네가 이렇게나 진심으로 말하고 있는데?

둘 사이에 어색한 침묵만 흐른다. 시간이 조금 흐르고 하잔이 입을 연다.

하잔 : 부모님은?

아토 : 아직.

하잔 : 일 나가셨어?

아토 : 아빠는. 엄만 오늘 쉬는 날인데 약속이 있어서.

하잔 : 쉬기도 하시는구나.

아토 : 응?

하잔 : 아니 신기해서… (사이) 넌 집에 들어와서 가장 먼저 하는 게 뭐야?

아토 : (잠시 생각에 빠지다가) 인사?

하잔 : 나는 불을 먼저 켜.

아토 : 왜?

하잔 : 깜깜해서. 너무 집 안이 어두워서 앞이 안 보여. 어떨 때는 부딪힐까봐 손으로 더듬거리면서 불을 켜. (피식 웃고) 우습지?

아토 : 매일 그래?

하잔 : …거의? 먼저 집에 들어가는 사람이 나니까. (열쇠꾸러미를 보여주며) 그래서 이 열쇠들도 나한테 있는 거고. 원래 처음에는 이렇게까지 많지도 않았어. (사이) 근데 어느 순간 이렇게 늘어있더라. 다 나를 위한 거래.

아토 : (열쇠꾸러미를 보다가 다시 하잔을 보며) 그 다음은? 불을 켠 다음엔.

하잔 : 인사해.

아토 : 누구한테?

하잔 : 허공에다가. 인사를 해야 집에 들어온 것 같거든.

아토 : 그리고?

하잔 : 멍하니 앉아있어. (사이) 아니 멍하니는 아니다. 머릿속에는 늘 이따 부모님이 집에 오면 하고 싶은 말을 고르고 있으니까. 오늘은 뭘 했고 뭘 먹었고. 그냥 그런 얘기들.

아토 : 시간 잘 가겠다.

하잔 : 그치만 생각할 때랑 말할 때랑 완전 다르지. 말을 할 때 훨씬 시간이 빨리 가잖아. 오히려 부족해서 매번 끝까지 못해. 그러면 내일 이어서 해야지 생각하는데 내일은 또 다른 일이 일어나니까. (사이) 결국엔 못하고 잊어버려.

아토 :잊어버리기 전에 나한테 하나 해봐.

기분이 좋은지 표정이 눈에 띄게 밝아진 하잔.

잠깐 생각하는가 싶더니 해줄 말이 떠올라 아토 쪽으로 몸을 완전히 튼다. 아토도 하잔에 맞춰서 몸을 틀어 마주본다.

하잔 : 언젠가 내가 꿈을 꿨는데 소라게가 된 적이 있어.

아토 : 소라게?

하잔 : 응. 소라껍데기 들고 다니는 게 말이야. 눈을 떴는데 내가 소라게인거야. 바닷속을 헤엄쳤어.

아토 : 걷는 게 아니고 헤엄을 쳤다고?

하잔 : (어깨를 으쓱이며) 뭐 어때. 꿈인데. (자리에서 일어나 헤엄치는 시늉을 하며) 헤엄을 치다 힘들면 껍데기 안에 들어가서 쉬고 또 심심해지면 나와서 다시 돌아 다녔어. (상자 밖을 한 바퀴 빙 돌다가 멈춰서) 그러다가 내가 갑자기 커버린 건지 껍데기가 작아져서 들어갈 수가 없는 거야. (다시 자리에 앉는다) 어쩔 수 없이 버렸어.

아토 : 껍데기를 버렸다고?

하잔 : 응. 그리고 다시 내 몸에 맞는 껍데기를 찾으러 다녔어.

아토 : 그래서 찾았어?

하잔 : 내 몸에 맞는 껍데기? (잠시 생각하다가) 몰라 나도. 그 전에 꿈에서 깼거든.

아토 : 찾았으면 좋겠다. 꼭 맞는 집.

하잔 : 찾았을 거야.

아토 : 어떻게 확신해?

하잔 : 그냥 느낌이 그래. (사이) 그러고 보니까 닮은 것도 같다. (아토의 얼굴에 가까이 가며) 너랑 소라게.

하잔의 말에 아토가 상자를 뒤집어쓰고 천천히 기어 다니는 행동을 취하며 소라게 흉내를 낸다.

그런 아토를 보며 하잔이 크게 웃는다. 아토도 따라 웃는다. 한참을 같이 웃다 하잔, 기지개를 편 뒤 다리를 쭉 펴고 편하게 앉는다.

아토도 하잔을 따라 편한 자세를 잡는다. 만족한 듯 얼굴에 미소가 지어진 하잔.

▲ 일러스트=윤은숙

다 쓰지도 못하는 방은 왜 이렇게 늘려. 
그럴 거면 집에 오래 있어야 하는 거 아니야? 
허울뿐인 방은 필요도 없다고. 
방이 많으면 뭐해 정작 그 안에 사람이 없는데. 
나는 진짜 집이 필요하다고…

하잔 : 끝도 없다. 역시 말할 때가 제일 시간이 잘 간다니깐.

아토 : 듣는 것도.

하잔 : …나는 많은 걸 바라는 게 아닌데.

아토 : 그러면?

하잔 : 재밌어하는 표정, 궁금해서 재촉하는 눈빛. 뭐 그런 거? (사이) 근데 피곤함 앞에선 다 소용없나봐.

아토 : 피곤하면 매일이 똑같아 보인데.

하잔 : 넌 그걸 어떻게 알아?

아토 : 들었어.

하잔 : 그 말 맞는 거 같아. (사이) 옆에서 보면 매일 같은 걸 먹고 같은 일을 하고 같은 집에 와서 잠을 자고, 또 같은 시간에 집에서 나가. (작게 한숨을 내쉬고) 도대체●뭘 위해서 그러냐고.

아토, 말없이 하잔의 말을 듣는다.

하지만 중간 중간 어깨를 토닥여주거나 듣고 있다는 걸 알려주듯 고개를 끄덕이며 반응을 보인다.

하잔 : 다 쓰지도 못하는 방은 왜 이렇게 늘려. 그럴 거면 집에 오래 있어야 하는 거 아니야? 허울뿐인 방은 필요도 없다고. 방이 많으면 뭐해 정작 그 안에 사람이 없는데. (잠깐 말을 멈췄다가 중얼거리듯) 나는 진짜 집이 필요하다고…

이때 멀리서 다급한 발소리가 들려오고 곧이어 하잔의 부모가 모습을 보인다.

하잔과 아토는 소리를 듣고 뒤를 돌아본다. 하잔을 발견한 두 사람은 걸어온다.

하잔의 부모는 화가 난 듯 보인다. 하잔은 자리에서 일어난다.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는 아토.

부모는 하잔과 아토를 번갈아 쳐다보다가 하잔에게 화를 낸다.

엄마 : (큰 소리를 치며) 한참 찾았잖아! 너 때문에 집에도 못 들어가고. 이게 뭐야 지금 이 시간까지!

아빠 : (하잔의 몸 여기저기를 살피며) 열쇠는. 열쇠는 안 잃어버렸지? 열쇠 어딨어?

하잔 : (인상 쓰며) 걱정 마. 잘 가지고 있으니까. (두 사람에게서 한 발짝 뒤로 떨어진다) 근데 열쇠 찾으러 온 거야?

엄마 : 그야 당연히!

하잔 : (엄마의 말을 끊고) 열쇠지. 알아. 기대하고 물은 건 아니야. (낮은 목소리로) 그치만 열쇠 보다는 나한테 먼저 괜찮냐고 물어봐야 하는 거 아니야?

아빠 : (하잔을 달래며) 우리는 열쇠를 잃어버리면 집에 못 들어가니까. 그러면 난감하잖아.

하잔 : 집을 잃어버릴까봐 불안한 건 아니고?

아빠 : 무슨 말을 그렇게 해!

하잔 : 맞잖아. 내 역할은 열쇠를 지키는 일이야. 그리고 그 열쇠는 집을 지켜주지. 아무도 못 들어가도록.

엄마 : 비아냥거리지 마.

하잔 : 나는 내가 왜 집을 지켜야 하는지 모르겠어. (잠시 멍하니 있다가 이내 울먹이며) 집은 나를 지켜주고 보듬어줘야지.

엄마 : 일단 집으로 가자. 가서 얘기하자. 내일은 일찍 나가야 해 아빠도.

하잔 : 싫어. 혼자잖아. 결국에는 또 혼자야 나는. (사이) 나는 엄마랑 아빠를 보고 있는데 둘은 집을 보고 있어. 항상 집만 생각하고, 집만 걱정하고. (소리치며) 나는 바보같이 그걸 아는데, 알고 있는데도 말을 할 수가 없어!

엄마 : 대신 남들이 못 가지는 큰 집이 있잖아. 갖고 싶어도 못 갖는 집.

하잔 : 아니. (흐르는 눈물을 닦고 감정을 가라앉히며) 우리가 갖지 못했어. 남들은 쉽게 갖고 있는 걸. 우리는 놓쳤지. (사이) 아직도 그걸 모르면 어떡해.

아빠 : 못 갖고 있는 게 뭐야. 남 부러울 거 없이 다 갖고 있어. 큰 집, 차, 비싼 옷. 우리는 다 너를 위해서 그러는 건데 그 정도는 네가 이해해야지.

하잔 : (덤덤하게) 그거 알아? 한 달에 한 번 대출금 갚고 외식하러 갈 때 매번 같은 식당에 가는 거. (사이) 그래도 아무 말도 안했어. 그 시간이 좋았거든.

엄마 : 그건… 정말 몰랐어. (사이) 미안해. (하잔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하지만 하나를 얻으려면 포기하는 것도 있어야 해.

하잔 : 우린 뭘 포기했는데?

아빠 : 포기했다기보다… 도시에서 알아주는 건 사람보다 넓은 집이야. 도시에서 사는 사람들 모두 근사한 집을 원하잖아. 우린 그 사람들이 원하는 걸 갖고 있고.

하잔 : 나는 집이 아닌 사람을 원해. 많은 방이 아니라 북적이는 방 한 칸이면 된다고.

아빠 : 뭐?

하잔 : 집이 먼저가 아니고 사람이 먼저야. 집은 공간일 뿐이야. 밥 먹고 잠자고 쉬는 곳. 그 이상이 되어버리면 안 되지.

엄마 : 그 이상이 뭔데.

하잔 : 나보다 집이 우선인거. 어느 순간부터 집을 물질로 취급해서 원하고. (소리치며) 겨우 넓은 집 하나 갖고 다 가졌다고 생각하는 거!

아빠 : (한숨 쉬며 손으로 머리를 짚고) 방 하나 더 늘려줄게. 조금 힘들지만 네가 필요하다면 할 수 있어. (부드러운 어조로) 괜찮아. 친구 데리고 와서 놀아.

하잔 : …우리도 상자에서 살까?

엄마 : (화를 내며) 저건 집이 될 수 없어! (아토가 앉아있는 상자를 가리킨다) 상자따위가 어떻게 집이 될 수 있니!

하잔 : 더 좋은 걸 버린다고 생각해?

아빠 : 그래. 말도 안 되는 억지를 피우고 있고.

하잔 : 추운 집에선 살기 싫단 말이야.

아빠 : 또 딴 핑계 대지마.

하잔 : 정말 추워. 바보같이 넓기만 하잖아.

엄마 : 그만해. 집에 가자.

하잔 : (허리에 차고 있던 열쇠꾸러미를 떼어내면서) 나는 이제 그만할래. 무겁고 힘들어. (두 사람의 눈을 보며) 그러니까 그만해도 돼. 충분해. 정말이야.

엄마 : (열쇠를 가리키며) 열쇠 조심해. 다시 넣어놔.

하잔 : 이거 봐. (뒤에 앉아있는 아토에게) 그렇게 얘기했는데 아직도 열쇠 타령이잖아. (손에 들린 열쇠로 시선을 옮겨) 이런 거 누가 가져간다고.

아빠 : 안 되겠다. (하잔에게 손을 뻗고) 그거 이리 줘 당장.

하잔 : 필요 없어 이제. (손에 있던 열쇠꾸러미를 땅에 버린다)

열쇠가 떨어지며 흩어진다. 하잔의 부모는 기겁하며 열쇠를 줍는다. 하잔, 그런 부모의 모습을 보며 실없이 웃는다.

그리고 뒤를 돌아 아토에게 간다. 아토도 자리에 일어나 상자를 손에 든다.

하잔 : 이제 어디로 가? 나 어디로 갈지 모르겠어.

아토 : (어깨를 으쓱이며) 나도 몰라.

하잔 : 그게 뭐야.

아토 : 그래도 찾았잖아.

하잔 : 뭘?

아토, 들고 있던 상자를 하잔에게 건넨다. 하잔은 상자를 받아 팔에 끼운다.

아토 : 껍데기. (하잔에게 웃으며) 갈까?

하잔 : 가자.

하잔과 아토는 부모의 반대방향으로 걸어 나가다 이내 무대 밖으로 사라진다.

무대 위에는 땅에 떨어진 열쇠를 찾는 부모만 남아있다. 암전. <끝>

 

▲ 이정모 신춘문예 희곡 당선자

■당선소감 이정모 / “후회하고 주저앉기 반복하며 많은 것 깨고 성장해”

문예창작과에 오고 처음 해보는 것들이 정말 많았다.

글 한 편을 완성해보고 합평을 받고, 모든 게 처음이라 많이 주저하고 소극적이었다.

후회하고 주저앉기를 반복하며 지금 많은 것을 깨고 성장한 것 같다. 앞으로도 계속해서 스스로를 깨가며 나아가겠다.

감사한 분들이 참 많다. 우선 전성희 교수님, 교수님의 수업으로 상자소년을 구상하고 그려나갈 수 있었다. 감사드린다.

그리고 글을 어떻게 쓰고 어떤 마음으로 써야하는지 방향을 잡게 도와주신 이경교 교수님과 한혜경 교수님을 비롯한 우리과 교수님에게도 감사드린다. 흔들릴 때마다 저를 잡아준 제 동기들과 친구들에게도 고맙다. 덕분에 든든하다.

그 밖에도 저를 가르쳐주신 선생님과 제 곁에 있는 분들 모두에게 감사하다. 마지막으로 부족한 제 글을 봐주신 심사위원과 경상일보 모든 관계자에게도 감사하단 말씀 드린다.

제 집이 되어주는 가족들을 사랑한다. 항상 제 마음을 다 표현하지 못해 미안한 마음이다. 가족이 있어 단단하고 온전한 내가 될 수 있었다. 아직은 많이 부족하지만 경험하지 못한 것들을 차근차근 해 나가며 열심히 글을 쓰겠다.

■약력
-명지전문대 문예창작과 재학중

▲ 김삼일 심사위원

■심사평 김삼일/ “인간·가족 간의 관계 등 예리한 심리묘사 수작”

예심을 거쳐 본심에 오른 작품은 32번 유토피아, 35번 축축한 숲, 36번 감정있습니까?, 30번 늙지못한 마음으로, 27번 빵(‘O’)의 전쟁, 25번 액자속 오두막 풍작, 20번 장난감 병정들, 16번 내려줘, 동아줄!, 39번 낙동강, 28번 상자소년 등 모두 10편이었다.

대부분 작품들이 현재의 상황이나 그 상황을 뛰어넘는 상상력으로 창의성이 돋보였다. 신춘문예의 특성상 희곡은 단막극의 성격을 갖추고 있는데 너무 욕심을 내어 등장인물이 많거나 장면을 무리하게 자주 바꾸는 작품도 있었다. 희곡은 읽는 희곡보다 무대에 올려 졌을 때 그 진가가 발휘되기 때문에 창작 할 때부터 무대를 상상하고 관객의 입장에서 공감 할수 있는 가치를 갖추고 있는지를 판단하면서 희곡을 창작해야 되는 것이다. 물론 관객도 취향에 따라 여러 층의 관객이 있을 수 있고 재미있다고 하는 관객이 있는가 하면 재미없다면서 관람 내내 심각하고 짜증스러운 표정을 짓는 관객도 있는 것이다. 관객에 따라 뜨거운 박수를 보내고 극장문을 나서는가 하면 공연히 와서 시간 낭비 했다는 관객도 있을 수 있다. 이번 당선작 28번 상자소년은 상자를 등장시켜 소외되고 있는 인간과 인간 간의 관계, 가족 간의 관계를 예리하게 조명하고 부모의 넓은 공간 넓은 세계를 개척하는데 따른 소외감, 불안감 등을 상자를 통해 수준 높게 창작했다.

■약력
-울산출신 연극연출가, 포항시립극단 상임연출
-한국연극예술상·이해랑연극상·대한민국연극대상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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