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화리(雲化里)는 온양읍 10개 법정동리 중 하나다. 정조 때와 고종 31년(1894)에는 대운동(大云洞)이라는 단일마을이었고 1911년에 대운(大雲)이라 서사(書寫)하여 대운동과 태화동(太和洞)으로 분동되었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두 동을 합하여 운화리(雲化里)라 하였다. 운화(雲化)는 대운(大雲)의 운(雲)과 태화(台化)의 화(化)를 따서 합한 이름이다. 운화리(雲化里)에는 상대(上大)·하대(下大)·태화(台化)의 세 행정마을이 있었다. 그러나 마을이 커짐에 따라 태화리가 태화1리∼태화3리로 확장되어 지금은 5개 행정마을로 되어 있다.

 온양읍 운화리와 경남 양산시 웅상읍의 경계에 대운산(大雲山)이 있다. 대운산은 수많은 봉우리가 첩중하며, 이 가운데 가장 높은 봉우리는 742m다. 대운산은 불광산(佛光山)이라 부르던 산으로 "환하게 밝다"는 뜻을 지녔다. 불광산의 "불(佛)"은 부처를 뜻하는 것보다는 성읍이나 도시를 뜻하는 "불"로, 벌(伐) 불(弗) 불(火) 부리(夫里) 비리(卑離)와 같은 것에 대한 차음(借音)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불광산이나 대운산이라는 이름 역시 크게 밝다는 뜻을 지닌 말이 되어 "밝은 성읍 터의 산"이라는 뜻으로 풀이된다. 여기에 나타나는 마을로서의 대운(大雲)은 대운산(大雲山) 아래에 있는 마을이라는 뜻이다.

 대운(大雲)에서 내원암으로 올라가는 산기슭에 대원사지(大原寺址)로 추정되는 절터와 4기의 석조부도가 있다. 부도는 석종형부도 2기와 팔각원당형부도 1기, 기타 형태의 부도 1기다. 이 가운데 한 부도에는 현하당(縣河堂)이라 음각하여 묘주(廟主)를 밝혀주고 있다. 이 절터를 절터골이라 부른다. 그런데 이 절이 망하게 된 원인에 대하여는 구전(口傳)해 오는 전설이 있다. 대원사는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등재될 정도로 크고 이름난 절이어서 신도들도 많이 찾아왔다. 그런데 이 절에는 괴이한 주지가 있어 사람들이 찾아오는 것을 몹시 귀찮게 생각했다. 어느 날 한 도사가 절을 찾아와서 잠시 쉬게 되었는데, 주지가 말하기를 "찾아오는 사람들이 많아서 귀찮으니, 적게 오게 할 수 없는가"라고 하였다. 이 말을 들은 도사는 "그런 일이야 어렵지 않은 일이니 근심하지 않아도 될"이라고 하였다. 그리고는 "마을로 내려가는 산모퉁이에 큰 길을 내면 소원대로 될 것이요"라는 말을 남기고 떠나버렸다. 도사의 말을 들은 주지는 산모퉁이를 헐어 길을 열었다. 그런데 작업 중에 석불(石佛) 한 구가 삽과 괭이에 찍혀 목이 떨어져 나갔는데 거기서 피가 흘렀다. 이 일이 있은 뒤 절에는 갑자기 빈대가 들끓게 되었고, 사람들이 견딜 수가 없을 지경이 되어 결국 절은 망하고 말았다고 전해진다.

 

저작권자 © 경상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