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 병상 부족 사태로 생존전쟁
생명과 죽음의 존엄성 지키기 위해
개개인의 자유 통제하는 힘 길러야

▲ 김상곤 전 울산시감사관

요즈음 우리의 하루는 숫자를 확인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눈을 뜨자마자 떠오르는 생각은 오늘도 확진자가 1000명을 넘었을까 하는 걱정과 두려움이다. 우리 사회가 감당할 수 있는 마지노선이 하루에 천명인 것처럼 그 선을 넘어가면 온 국민의 하루는 우울하다. 여기에다 바이러스 감염으로 어제 죽어간 사람들의 숫자까지 더해지면 이런 통계숫자와 나는 무관하다고 안심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1000이라는 익숙한 숫자가 우리 사회와 개인이 처한 위험도를 측정하는 기준이 된 것 같다. 더구나 치료 병상이 부족하여 기다리는 중에 죽음을 맞이하는 경우도 생겨난다는 소식은 바이러스 감염과 죽음과의 거리가 점점 가까워진다는 뜻이다.

바이러스는 인간이 죽음을 받아들이는 자세에 대해서도 많은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인간 생애의 의미나 죽음을 받아들이는 정서도 나이에 따라 달라진다. 우리는 예로부터 지천명, 불혹, 이순, 고희와 같은 의미를 한 사람의 생애에 부여해 왔다. 여기에는 고희와 같이 죽음과 연관된 숫자도 포함되어 있다. 나이 70이 된다는 것은 매우 드물다는 뜻이다. 나이와 죽음의 친밀성에 대한 이러한 정의가 바이러스로 인하여 좀 더 명확해지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매일 방송에 나와서 어제 죽어간 사람의 숫자를 설명하는 질병관리청의 책임자도 바이러스로 죽어간 사람의 대부분이 60세 이상의 기저질환 환자라고 자세하게 설명한다. 젊은 사람들에게 불필요한 공포감을 가지지 말아달라는 메시지이기도 하지만 60세 이상이 되면 어차피 죽음의 위험과 그리 멀지 않은 사람들이라는 의미도 함축되어 있는 것 같다.

인간의 생명은 누구에게나 소중하고 나이가 든다고 그 가치가 줄어드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치매와 같은 중증질환을 앓고 있는 노인이라도 바이러스에 대한 치료를 생명이 다할 때까지 지속한다. 그러다 보니 생명을 살리는 중환자실의 대부분을 노인들이 차지하게 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현실이다. 문제는 중환자를 받아들일 수 있는 병실이 바닥났다는 경고 신호가 매일 보도되고 있다는 것이다. 더 많은 병상을 확보하기 위해서 정부가 노력하겠지만 무한정 늘어날 수는 없을 것이다. 기다리다가 죽음을 맞이하는 경우가 더 이상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지만 지금의 추세를 보면 이것도 장담할 수 없을 것 같다. 미국에서는 코로나 사태가 인간의 존엄성이나 생존권 같은 기본적인 가치를 보장하기 어려운 상황에 접어들었다고 한다. 어느 주에서는 생존 가능성이 높은 환자부터 치료한다고 한다.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고 하지만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러한 선택을 해야 하는 의료인들의 심정이 어떨지는 짐작하기 어렵다.

동양사회에서는 노인이 사회로부터 소홀히 대접받는 것을 피하기 위하여 효가 모든 행동의 근원이라고 어려서부터 가르쳤다. 이러한 미풍양속이 인간사회의 소중한 가치로 유지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그러나 병상이 모자라 젊은이들이 위험에 빠지는 경우에도 모든 인간은 동등한 대우를 받을 권리가 있다고 주장할 수 있겠는가?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논의의 여지가 있다고 본다. 지난 시간을 돌아다보면 평생동안 사회나 타인을 위해서 별로 한 일이 없는 삶을 살아 왔다는 것을 절감한다. 거기다가 나이 들어서도 자신의 생명을 연장하기 위해 매일 막대한 양의 공공자원을 소모하고 주위 사람들을 힘들게 하는 일을 겪는다면 허투루 보낸 젊은 날의 시간보다 더 후회스러울 것 같다. 인간의 존엄성은 살아서 뿐만 아니라 죽어가는 과정에서도 추구하고 보호해야 할 가치임이 분명하다. 안전한 삶을 위해서도 그렇고 삶의 마지막이 어떤 종교나 철학으로도 감당하기 어려운 황폐한 시간으로 끝나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도 우리 모두 다시 힘을 모아야 한다. 생명의 존엄성을 추구하기 위해서 우리의 선조들이 온힘을 다했듯이 바이러스로부터 죽음의 존엄성을 지키기 위해서 우리 스스로 개인의 작은 자유를 통제하는 힘을 길러야 한다. 김상곤 전 울산시감사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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