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구대암각화 발견 50주년, 그동안 우리는 무엇을 했나]
(2)전국민의 관심으로, 세계인의 유산으로!

▲ 2014년 정부조사 과정에서 반구대암각화 전면과 그아래 암반이 훤히 드러났다. 1965년 사연댐 축조 이후 거의 유일하다.

대곡천 천전리 각석·반구대 암각화
선사시대 유적·숨결 고스란히 간직
반세기 넘도록 보존 대책은 제자리
폭우에 잦은 침수로 원형훼손 심각
10년 전 유네스코 ‘잠정목록’ 등재
세계 문화유산의 가치 널리 알리고
원형 그대로 보존할 방안마련 시급

울산시 울주군 언양읍 일원에는 선조들이 ‘신선골’이라고 불렀던 곳이 있다. 양옆에 산을 낀 골짜기를 따라 큰 물이 흐른다. 천전리를 찍고 대곡리를 휘감으며 구비 돈다. 대곡천이다. 물길따라 발길을 옮기다보면 2개의 국보를 차례로 만난다. 상류 쪽에서 국보 제147호 ‘울주 천전리 각석’을 먼저 만난다. 국보 285호 ‘울주 대곡리 반구대 암각화’는 그 보다 3㎞ 쯤 떨어진 하류 쪽에 있다. 국보를 품은 대곡천 물줄기와 주변의 절경들을 하나로 묶어 ‘대곡천 암각화군’이라고 한다. 10년 전 유네스코 세계유산 잠정목록에 들어갔다. 현재는 이 ‘잠정목록’ 꼬리표를 떼기위해 정부와 울산시가 노력 중이다. ‘반구대 암각화’라는 이름으로 세계유산 우선등재 목록에 올리려 한다. 사전작업 일환으로 그 일대를 명승으로 지정하는 작업도 추진 중이다.

이 곳은 선사시대에서 역사시대에 이르는 유적은 물론 고대에 형성돼 현재까지 이어지는 자연환경이 비교적 그대로 남아있다. 땅 밑을 팔 때마다 선사의 생태계를 보여주는 공룡발자국이 나올 뿐 아니라 역사시대 이후 근대에 이르기까지 자연과 인간과의 조화된 관계를 생생하게 보여주기도 한다.

울주 천전리 각석은 독특한 유적이다. 혹자는 한국에서 가장 일찍 새겨진 암각화로 인식한다. 신석기말 또는 청동기 초기의 동물과 인물상, 청동기 중기 이후의 것으로 보이는 추상 암각화, 철기시대의 선각 인물과 동물상, 삼국시대와 통일신라에 쓰인 글씨 등이 여러 층으로 중첩돼 있다.

울주 대곡리 반구대 암각화는 햇볕을 등진 북향 암면에 새겨졌다. 비를 피해 그림을 보호하듯 절벽의 경사도가 비스듬하게 기울어져 있다. 그 유명한 고래와 호랑이 그림은 전 세계 단일면적 암각화 중에서 가장 많은 수를 자랑한다. 그 밖에도 늑대와 사슴, 고깃배와 사람 등이 면과 선으로 새겨졌다. 제작 연대는 청동기로만 알려져오다 최근 학계를 중심으로 7000년 전 신석기의 끝무렵까지 끌어 올리려는 연구가 활발하게 이뤄지고 있다.

울주 대곡천을 다시 찾았다. 암각화를 만나러 가는 길은 언제나 여러가지 심경이 공존한다. 선사의 숨결이 뿜어져 나오는 계곡 속으로 한걸음씩 들어 설 때마다 수천년의 풍파를 이겨 낸 암각화의 고장에 두 발을 딛고 살고 있음에 자부심을 느끼곤 한다. 가끔은 암각화가 지금의 상태를 유지하기까지는 초자연적 신(神)의 배려가 있었기에 가능했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 암각화가 그려진 바위면은 단단함의 정도가 그다지 강하지 않다는 걸 쉽게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어쨌거나 암각화로 향하는 길섶의 나무, 바위와 벼랑, 냇물과 습지를 지나 하늘을 덮는 대숲을 지날 때는 시공간을 초월한 그 어느 곳으로 시간여행에 나서는 듯 기분이 묘하기까지 하다. 대곡천 일원은 지역 문화와 문화재 정책의 이슈현장으로 자주 거론되기에 남들보다는 자주 이 곳을 찾게 되는데, 놀라운 점은 이 곳을 방문할 때마다 분명 같은 곳인데도 조금씩 다른 풍경을 보게 된다는 점이다.

그 날의 습도나 햇볕의 강도, 오전·오후 방문 시간대에 따라 대곡천의 분위기와 암각화의 상태는 확연하게 다르다. 방문 시점에 따라 바위면의 명도와 그림자의 두께가 변화하는데 그 영향 때문인지 암각화의 선명함과 깊이감도 다르게 연출된다. 암각화를 찾을 때마다 매번 달라지는 느낌을 주기에 어떤 때는 경외감마저 느껴질 때가 있다.

소설 ‘반구대’를 쓴 구광렬 울산대 교수 역시 작품을 구상하며 이 곳을 자주 들렀던 사람 중 한 명이다. 구 교수 역시 비슷한 경험을 한 것 같다. 소설가의 상상을 통해 표현이 좀더 실감난다. “울주군 언양읍 대곡리를 찾아 나섰다. 망원경으로 강 저편 절벽을 봤지만 훼손이 심한 탓에 그림들은 쉽게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러기를 몇 차례, 망원경의 초점을 위 아래로 맞추다 보니 멧돼지와 고래 그림들이 눈에 들어왔다. 하지만 나머지 그림들을 식별하기엔 역부족이었다. 그 후 기회가 되면 그곳을 찾았다. 비가 세차게 내린 뒤 맑은 한여름 어느 날 오후였다. 암벽 우측 하단부의 조그만 인면상까지 하나하나 확인할 수 있었다. 아찔한 기분이 들었다.”

이같은 짧지만 강렬한 느낌은 암각화를 지척에 두고 자주 방문할 수 있는 사람들에게만 허용되는 특혜다. 소문을 듣고 서울이나 부산 어귀에서 단 한번 방문한 이들에겐 감동의 기회가 주어지기 힘들다. 대곡천을 찾을 때 안타까운 마음이 들 때가 있는데, 이 곳을 처음 찾아 온 외지 방문객과 함께 할 때 가장 그렇다. 대곡천을 사이에 두고 멀찍이 떨어진 반구대 암각화를 봐야 하는 전망대는 방문객이 내뱉는 한숨 때문에 탄식의 언덕이 돼 버리기 일쑤다. 그 곳에 설치된 망원경 만으로는 사실 눈이 아프도록 동공을 돌려봐도 암각화의 실체를 확인하기 어렵다. 커다란 안내판의 설명을 아무리 읽어도, 사전에 한두시간 이상 암각화박물관에 머물며 그나마 실제와 비슷한 입체 암각화를 미리 감상하지 못했다면, 현장의 암각화가 얼마나 귀중한 가치를 지녔는지 그리고 선과 면의 바위그림이 얼마나 세심하게 그려진 것인지 제대로 파악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문화해설사들이 전문적이고도 친절한 설명으로 한반도 문화의 시원임을 아무리 피력해도, 현장에서 제대로 된 감동을 경험하지 못한다면, 의욕을 갖고 멀리서 찾아 온 손님일 지라도 백이면 백 실망감을 느끼며 되돌아간다. 결국에는 반구대 암각화의 실체를 알아 볼 시간도 없이 고대인의 숨결을 느껴 볼 영험의 기회 마저 놓치게 된다.

천전리 각석과 반구대 암각화는 대곡천 바위에 선사인이 그림으로 남긴 역사책이라고 할 수 있다. 한반도 문화의 출발점이자 세계적인 문화유산임에 틀림없으나 발견된 지 반세기가 넘도록 보존방안은 마련되지 못했고 오히려 원형이 훼손되는 실정이다.

두 국보를 낀 대곡천 암각화군은 어느 지역 특정 주민들에게만 의미있는 문화유산이 아니라 모두가 지켜야 할 자산이다. 현 시점에는 전 국민이 이를 제대로 인식할 수 있도록 그 가치를 제대로 알리는 일이 급선무다. 대곡천 암각화군이 왜 그토록 원형 그대로의 모습으로 보존돼야 하는 지를 좀더 효과적인 방법으로, 보다 많은 이들에게 알리는 일이 절실하다. 홍영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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