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세계유산도시의 시민이라면 이 정도는(1)

▲ 천전리 각석 실측도, 주암면 확대 이미지. 제공=울산대 반구대암각화유적보존연구소

‘천전리각석’과 ‘반구대암각화’, 어느 바위그림이 먼저 새겨진 걸까.

울산 시민들은 세계문명사에 유래없는 인류유산을 지척에 두고 있다. 그것도 2기나 된다. 그럼에도 오랫동안 무관심했다. 그나마 현재는 유산(국보)의 이름 정도는 제대로 인지하게 된 상황. 이제는 두 인류유산에 대해 얼마나, 제대로 알고 있는 지 우리 스스로 되물어 볼 시점이 된 것 같다.

뉴스보도는 언제나 정권 따라 바뀌는 정부 정책이나 그에 대한 지자체의 대응 수준, 아니면 전문가 수준의 디테일한 보존방안과 성공 및 실패요인에 방점을 둔다. 물론 중요하지 않다는 게 아니다. 다만 발견 50주년인 올해는 두 바위그림 자체의 내용이나 의의를 깊이 있게 들여다 보자는 것이다.

두 바위면 중 어느 쪽이 먼저 새겨진 건지, 그들 선사인의 시대는 어떠했는지, 한쪽 문양은 왜 기하학 무늬가 많은지, 아랫쪽 다른 바위는 왜 동물문양이 그토록 그득한 지, 그림의 갯수가 연구기관마다 달라지는 이유는 무엇인지….

적어도 ‘이제 곧’ 세계유산도시의 시민이 되고자 한다면 이제부터라도 달라져야 한다. 상식 선을 벗어나 ‘시민해설사’에 준하는 역사문화의 세계로 기꺼이 한발 더 들어가 보자. 이에 도움 될 만한 이야기들을 3회에 걸쳐 싣는다.

▲ 1970년 국내에서 처음으로 발견된 암각화인 천전리각석.

한반도 최초의 역사서 ‘천전리각석’
높이 3m·너비 10m 직사각형 바위면에
마름모·동심원 등 기하학적 무늬 중심
사람·동물·용·배 등 다양한 내용 구성
선사~현대까지 여러 시대의 모습 담겨
반구대보다 앞선 시기부터 제작 추론도

국보 제147호 울주 천전리각석은 국내에서 처음 발견된 암각화다. 한반도 선사인의 흔적과 바위그림에 대한 연구는 천전리각석 발견 전과 후로 나뉘어졌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1970년의 일화는 ‘한반도 최초의 역사서’를 발견한 것과 다름없다.

천전리각석의 바위면은 전체적으로 15도 정도 기울어졌다. 높이 약 3m, 너비 약 10m의 직사각형 바위면에 선사시대 암각화와 신라시대 세선화, 명문이 새겨져 있다. 각석은 아래·위 2단으로 나누어 서로 다른 내용이 각기 다른 기법으로 표현돼 있다.

윗단에는 쪼아서 새기는 기법으로 기하학적 무늬와 동물, 추상화된 인물이 조각돼 있다. 사실성이 떨어지는 단순화된 형태인데 중앙부의 태양을 상징하는 듯한 원을 중심으로 양 옆에 네 마리의 사슴이 뛰어가는 모습과 맨 왼쪽의 반인반수(半人半獸)상이 눈에 띈다. 표현이 소박하면서도 상징성을 갖고 있는 듯하다. 돌로 쪼아 새긴 동물과 사람, 추상적인 기호 그림이 특히 많이 확인된다. 그 위에 덧새겨진 마름모, 동심원, 물결무늬가 전체 구도의 중심에 놓여져 있다.

아랫단은 선을 그어 새긴 그림과 글씨가 뒤섞여 있다. 기마행렬도, 동물, 용, 배를 그린 그림 등 다양한 내용을 구성된다. 기마행렬도는 세 군데에서 나타나는데 간략한 점과 선만으로도 그 모습이 잘 표현된 것이 특징이다. 배 그림에 대해서는 옛 신라인의 해상활동을 보여주는 자료로 해석되고 있다.

남아있는 글자는 비교적 선명하다. 양갈래로 활짝 펼친 공책에 무심히 글을 쓰듯 글씨가 새겨졌다. 글자 수는 800자가 넘는데 완전히 알아볼 수 있는 글자는 300여자 내외다. 오른쪽의 명문은 을사년(525년)에 법흥왕의 동생인 사부지갈문왕 일행이 새긴 것으로 이를 원명(原銘)이라고 한다. 왼쪽에는 원명으로부터 14년이 흐른 뒤 그 곳을 다시 찾은 이들이 새긴 것이다. 기미년(539년)에 사부지갈문왕의 부인 지몰시혜비와 아들 심맥부지(진흥왕)가 남긴 것인데 이는 추명(追銘)이라 한다. 이밖에 화랑들이 다녀가며 흔적을 남긴 글도 많으며 관직명이나 6부체제에 관한 언급까지 돼 있어 6세기 전후 신라사회연구에 귀중한 자료로 활용되고 있다.

지난 해(2020년)는 반구대 암각화 보다 1년 앞서 발견된, 천전리각석이 정식으로 학계 보고된 지 50년이 되는 해다. 울산암각화박물관이 그 의미를 그냥 넘길 수 없어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그해 10월 울산 동구 현대라한호텔에서 ‘천전리 암각화 발견 50주년 학술대회’를 개최했다.

한반도 암각화와 아시아권 고대미술 전문가인 전호태 울산대 교수는 천전리각석의 제작 연대에 대해 명확한 특정 시기를 규정하지는 않았으나 최소한 반구대 암각화 이전의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고 추론했다. ‘신석기와 청동기 등으로 추정되는 반구대 암각화보다 어쩌면 훨씬 더 이전에 새겨졌을 수 있다’는 것이다. 천전리각석의 그림 중에는 그냥 봐서는 잘 모르지만 3D 스캔 등 섬세한 작업의 결과에 따르면 날카로운 것으로 긁어 새긴 듯 한 수천여 개의 선이 확인된다. 주암면에 깊게 새겨진 기하문(추상적인 무늬)은 육안으로도 볼 수 있다. 이처럼 바위에 무언가를 새기며 소원을 비는 행위는 전 세계적으로 통용되는, 구석기의 돌에 대한 신앙의 결과물이라는 것이다.

이에 대한 추가 설명은 전 교수가 지난 연말 펴 낸 <글바위, 하늘의 문>에서도 이어진다. ‘울산 천전리 각석 이야기’ 부제의 책 내용에도 ‘바위에 그림을 그리는 그리거나 새겨 넣는 일은 구석기시대부터 시작됐다’고 한다. 이어 ‘구석기에 시작된 바위그림 그리기는 지역별로 서로 다른 삶의 경험이 작용한 예술활동이다. 바위그림은 아름다움과 신앙을 함께 나타내려는 인간 특유의 몸짓이 남긴 흔적이라는 점에서 현재와 과거가 만나는 의미있는 통로로 주목된다. 선사부터 현대까지 오랜 기간 쉼없이 경주와 울산 인근 사람들의 종교와 신앙, 사회와 문화활동의 무대이자 캔버스로 사용된 울산 천전리각석은 바위그림의 역사를 말해주는 첫 번째 대화상대로 손색 없는 유적’이라고 덧붙였다.

결과적으로 천전리 각석은 선사-고대-중세-현대에 이르기까지 어느 특정 시대에 국한되었다기 보다 여러 시대의 모습이 중첩되는 시대의 합작품이라는데 의미가 크다. 무엇보다 바위면의 새김 활동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상당히 최근까지 이뤄졌을 수 있다. 전 교수는 “연구자에 따라 다르지만, 국보 지정 직전까지도 행해졌을 것으로 추정하는 견해도 있다”고 했다. 천전리 각석의 국보 지정은 1973년 이뤄졌다. 홍영진기자 thinpizza@ksilb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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