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예술 서로 다른 세계이기 보다
과학적 사실에 아름다움 더하는 순간
더욱 안정되고 신비롭게 느껴지기도

▲ 윤범상 울산대 명예교수·음악이론가

친구로부터 따끈따끈한 책이 배달되어 왔다. 친구 부부가 쓴 책이다. 친구는 물리학자이고, 부인은 화가이자 소설가이다. 요컨대 친구는 전형적인 자연과학도이고 부인은 인문예술학도이다. 학문분류스케일에서 보자면 서로 통하기 어려운 먼 거리, 어찌 보면 사물을 대하는 시각(視覺)과 방법론에 있어서 서로 대립적인 위치에 있을 것 같은 두 사람이다. 그들이 나눈 대화를 엮은 책이다. 그 책에서 친구는 ‘아!’라는 호칭으로, 친구의 아내는 ‘어!’라는 호칭으로 묘사되어 있다. 아마도 ‘아! 그런 거였어? 지금까지 몰랐었네.’ ‘어! 그으래? 이제야 알겠네.’ 라는 의미가 아닐까.

이 책의 내용을 요약해보자. 얼핏 보면 인간본성, 인간생활과 인간환경, 인간이 꾸는 꿈과 상상의 나래 등 인문학의 관심사와, 태양계와 우주의 근원, 그들의 움직임과 역학(力學)관계, 줄기세포와 생명과학 등 과학의 관심사는 각기 그 본질이 완전히 달라 보인다.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 둘은 서로 다른 세계를 얘기하는 것이 아니고, 같은 것을 다른 언어(言語)로 표현할 뿐이라는 것이다. 실제로 책을 읽으면서 그 둘 사이에 놀랄만한 유사성(類似性, similarity)과 관련성(關聯性, relevance)을 발견한 나머지 나 자신 여러 차례 ‘아!’ 하고 탄성을 질렀다. 이 책을 읽고 난 후, 만년공학도인 나는 과학적 엄밀성이나 경직성보다 오히려 인문학의 과장이나 상상력이야말로 경이로운 인간의 각종 면모를 더욱 잘 설명할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그 책에서 말하는 예를 하나 소개해보자. 인간생활의 하나로서 생일날 먹는 미역국-그 재료는 미역과 소고기와 물과 양념이다. 이 재료들의 먹이사슬을 살펴보면 그 원천은 식물(植物)이다. 식물은 태양에서 오는 빛을 흡수한 후 광합성(光合成)을 통해 빛에너지를 화학에너지로 바꾼다. 즉 미역국을 먹는다는 것은 결국 태양의 빛을 먹는 것이다. 먹는다는 인간의 행위가 궁극적으로 우주와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음식을 먹는다는 일이 단순히 생존목적, 아니 그 이상의 종교적 의미를 가지며, 왜 먹는 것을 제례의식으로 삼고 있는지도 분명해 진다. 과학적 사실탐구를 통해 얻어진 지식이 종교의례라는 신앙행위를 해치기는커녕 오히려 신앙과 과학의 관련성을 더욱 명징(明徵)하게 설명한다고도 볼 수 있는 것이다.

웃기는 얘기지만, 나와 내 친구들 몇 명이 대학 입학하던 1970년도에 조직한 모임인 ‘술예술파’가 생각난다. 그 모임의 취지는 이러했다. ‘통상 우리는 기분 좋다고 한잔, 기분이 우울하다고 한잔, 또는 축하할 일이 있다고 한잔…. 이렇듯 술을 방법(方法)으로 마신다. 이건 술에 대한 실례이다. 술을 만든 인류조상에 감사하고, 술을 마시면서 시를 읊고 예술을 이야기하는 것이야말로 술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이다. 술을 경외하며 목적(目的)적으로 마시자.’ 술이라는 과학의 산물에 인문학적(?) 뻥튀기 상상력을 잔뜩 담아 술잔을 두 손으로 높이 들어 술 숭배 세레머니를 하고 마시던 기억이 난다.

영국의 아서 에딩턴(Arthur Eddington, 1882~1944)은 별이 밝게 빛나는 이유가 태양과 마찬가지로 수소가 결합하여 헬륨으로 핵융합하면서 내는 빛에너지라는 사실을 최초로 발견한 사람이다. 그가 그 사실을 발견한 날 저녁, 여자 친구와 만나 식사를 한 후 벤치에 앉았다. ‘에딩턴, 별이 얼마나 아름답게 빛나는지 보세요!’ 그의 여자 친구가 말했다. ‘그렇소. 그리고 지금 이 순간 저 별들이 어떻게 빛을 내는지 아는 사람은 이 세상에 나 혼자뿐이요.’ 이 일화는 과학자라는 사람들이 얼마나 무드 없고 삭막한 인간들인지를 보여주는 단적인 예로 자주 등장한다.

한편 관점을 달리하면, 별이 반짝이는 이유와 함께 그 별빛이 몇 십 년 또는 몇 백 년 전에 별을 떠나 지금 이 순간 우리 눈에 도달했다는 과학적 사실이 오히려 별빛의 아름다움과 우주의 신비로움을 배가시킨다. 아침 햇살에 호수의 물이 반짝반짝 빛나는 것이 햇빛이 물 표면에서 난반사하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알면 오히려 더 신비롭게 느껴지듯이 말이다. 신비로움, 아름다움은 결코 과학의 반대편에 있는 정서가 아닌 것이다.

책의 말미엔 ‘날개 하나로 날아다니는 새나 나비를 본 적이 없다. 하나의 날개로는 나아가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맴맴 돌기만 할 것이다’라고 결론한다. 과학과 예술이란 양쪽 날개를 달고 삶을 살아간다면 그 비행은 든든하고 안정되고 균형이 있을 것이다. 왠지 마음이 너그러워지고 행복해 진 것 같다. 윤범상 울산대 명예교수·음악이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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