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려운 이웃들에게 선뜻 내민 손
머리나 마음이 동한다 하더라도
몸이 움직이지 않으면 소용 없어

▲ 정진원 K Classic 콘텐츠연구소 소장

오늘 나의 화두는 일체유신조(一切唯身造)이다. 모든 것은 마음 먹기 달렸다는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아님에 주의하시라.

두 달 정도 아침마다 동네 길걷기 도반이 있어 만보 걷기를 하고 있다. 함께 거닐며 전날 있었던 일을 이야기하는 것도 즐겁지만 어쩌다 혼자 걸으면 바야흐로 동네 ‘철학자의 길’이 펼져진다. 왜 칸트가 다니던 하이델베르크 언덕길만 철학자의 길이던가, 그것을 따라 함직해 보이는 교토 은각사 옆 철학자의 길만 부러워 할 일인가. 나는 오늘 부로 나의 산책로를 철학자의 길로 명명하는 바이다.

얼마전 함박눈이 펑펑 내리는 날 신문기사에 폭설 속 서울역 앞 ‘노숙자와 신사’ 사진 한 장이 올라왔다. 내용인즉슨 춥다고 커피 한잔 사달라는 노숙자에게 한 중년 남성이 외투와 장갑 그리고 5만원을 주고 표표히 사라졌다는 것이다.

그 순간 일체가 몸에 지닌 것들이 만든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머리보다 마음보다 몸이 먼저 시켜서 한 일이라고…. 아니라고 반박하실텐가? 그것은 마음이 시켜서 한 일이라고? 과연 그럴까. 일상을 사노라면 길거리에서 만나는 노숙자가 한둘이던가. 구걸하는 사람이 어디 서울역에 하나뿐이던가.

눈내리는 한 겨울에 한 남자가 몸이 있기에 추위를 느끼고 도와달라 입으로 말하기에 마침 그 시간과 공간을 관통하던 지점의 바로 그 사람이 자기 몸에 지니인 것들을 나눈 것이다. 응답한 것이다.

마음에서 일어난 일이라 나는 말할 수 없다. 우리 동네 서강대역 광장에도 매일 아침 걷다가 지나치는 노숙자가 하나 있다. 영하 17도인가에도 텐트 하나가 건재하다.

지나칠 때마다 마음으로 춥지 않을까, 저 빈약한 텐트 안에서 과연 엄동설한의 밤을 날 수는 있을까. 마음으로 걱정만 한 나로서는 도저히 저 장면을 일체유심조라고 말할 수 없다.

그러더니 그 텐트가 강추위에 며칠 사라졌다가 오늘 텐트없이 자기 짐을 챙기는 노숙자를 보았다. 안도와 한숨이 동시에 나왔다. 그렇다고 마음내서 그의 곁에 가지는 못하였다.

이러한 나도 가끔 안국역 지하도 계단 중간에서 구걸하는 사람에게 돈을 줄 때도 있다. 스님 옷 입고 구걸하는 조계사 앞 거지에게는 얄짤없다.

맹자는 차마 못하는 마음을 설명하며 우물가에 빠지려는 아기를 나도 모르게 구하는 예를 든다. 마음보다 몸이 먼저 달려가는 것이다. 저 아기가 조금 더 가면 우물에 빠지겠지. 지금 구할까 말까, 걸어갈까 뛰어갈까가 아니라 보는 순간 눈이 다리에게 시키고 손이 저절로 아이를 위험에서 구하는 것이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두툼한 옷을 벗고 끼고 있던 장갑을 건네고 주머니 속 비상금이었을지 모를 5만원권을 상대의 손에 건네 준 것이다. 그뿐이다. 그에게도 노숙자였던 시절이 있었을지, 그러한 가족이나 친지가 생각났을지 심지어 누군가에게 사기꾼이었을지는 중요하지 않다. 그저 그 순간, 그 시간과 공간에 추위에 따듯한 차 한 잔이 절실한 한 인간을 만나서 말없이 자기 몸에 있던 것을 나누고 자기 갈 길을 간 것이다.

마음이야 천리 앞을 달려도 몸이 움직이지 않으면 아무 것도 아니다. 여기서 원효가 깨닫고 말했다는 ‘일체유심조’를 한 수 아래로 두려는 것이 아니다. 심지어 며칠 전에 나는 그 원효에 대한 책을 내기까지 한 사람이므로.

오히려 그리하여 일체유신조가 일체유심조보다 허술하다고 말하지 않는 것이다. 연탄재 함부로 차지 마라. 너는 누구에게 그토록 뜨거운 적이 있었느냐. 안도현의 시가 찌르듯 나에게 묻는다.

정진원 K Classic 콘텐츠연구소 소장

 

저작권자 © 경상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