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나 소중한 가치 부여받아온 식사
최근 몸의 한계 시험하는 놀이로 전락
빈곤·기아문제 등 돌아보는 지혜 필요

▲ 김상곤 전 울산시감사관

‘언제 밥 한번 먹읍시다.’ 우리가 지인과의 가벼운 만남을 끝내면서 할 수 있는 가장 편안한 작별인사다. 이 말은 친밀한 사이의 사람들뿐만 아니라 사업과 같은 공적인 만남에서도 무리 없이 사용할 수 있는 인사다. 그다지 구속력이 있는 약속이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밥을 함께 하자는 말은 언제 들어도 기분이 좋다. 함께 음식을 먹는다는 것은 인간의 가장 절실한 욕구인 식욕을 충족하는 과정에 참여하는 것이다. 그 과정을 함께 한다는 것은 상대방을 사적인 공간으로 초대할 정도로 신뢰한다는 의사표시이기도 하다. 이렇듯 음식을 함께 나눈다는 행위는 어느 사회에서나 나름대로 문화적인 의미를 함축하고 있으며 심지어 종교적인 의식으로까지 위상이 높여진 경우도 있다.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한 최후의 만찬은 단순한 저녁식사가 아니라는 것을 다빈치의 그림을 보면 알 수 있다.

가족 간의 식사도 마찬가지다. 한때 정치적인 이슈가 되었던 ‘저녁이 있는 삶’도 가족들이 함께 저녁식사를 하는 그림을 염두에 둔 슬로건임이 분명하다. 식사자리에서의 잔잔한 담소와 웃음은 행복을 바라는 인간이 경험할 수 있는 최고의 순간이라 여겨져 왔다. 여기에는 사람들 사이의 친밀한 감정뿐만 아니라 잘 차려진 음식에 대한 고마움이 함께 동반되어야 가능한 일이다. 모든 종교가 음식을 앞에 두고 기도나 예를 올리는 것도 그 때문이다.

동서고금을 통하여 가장 소중한 가치를 부여받아 온 식사, 즉 먹는다는 일이 이제는 문화적 의미를 조금씩 상실하고 있는 것 같다. 인간의 육신이 외부 세계를 받아들이는 가장 근본적인 대상인 음식이 신성함을 상실하고 위장의 한계를 시험하는 놀이의 기구로 사용되는 것 같아 걱정스럽다. 동화 속의 거인들이 실제로 TV 속에 나타나 집게로 고기 덩어리를 입 속으로 집어넣고 우리는 이들을 보면서 박수를 치고 좋아한다. 그들의 강렬한 식욕과 행복감을 공유하고 싶은 것이리라 짐작한다. 이러다보니 소고기 3,4㎏ 정도는 한자리에서 해치우는 정도가 되어야 방송에서 주목을 받는다. 20대 초반의 한 여성은 곱창 16m을 한 번에 먹어치웠다고 웃으며 말한다. 더 놀라운 것은 이들이 먹으면서 벌어들이는 수입이다. 채워지지 않는 식욕을 바탕으로 열심히 먹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만으로도 한 달에 1억은 훨씬 넘게 벌어들인다고 했다.

앞으로 다가올 시대를 짐작하고 예언한 수많은 선지자나 종교 지도자들이 많았지만 아무도 이런 세상은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동화 속에서도 채워지지 않는 식욕을 가진 사람은 허기로 고생하는 불행한 사람이었다. 이제 그들에게 이 세상은 천국이나 다름없다. 음식은 넘쳐나고 그들이 위장에 무엇을 넣을 수 있는 가를 보려고 사람들이 끝없이 동전을 던지고 있는 것이다. 앞으로 부모가 아이의 진로를 결정할 때 중요하게 고려되는 것이 자녀의 먹는 능력이 될 지도 모른다.

음식이 지구상 어디에나 풍부하다면 많이 먹는다고 누가 뭐라 하겠는가. 그러나 채널을 한번만 돌리면 잔인한 현실이 우리의 눈을 어지럽힌다. 우유 한 모금을 마시지 못해 기진맥진한 아프리카의 아이는 죽음의 냄새를 맡고 달려드는 파리가 눈가에 조롱조롱 매달려 있어도 눈을 떠서 쫓을 기운이 없다. 멀리 달려간 여배우가 이들을 구하기 위해서는 우리들의 작은 동전이 필요하다고 호소하여도 그다지 호응을 얻는 것 같지는 않다. 또 다른 방송 채널에서는 북극의 빙하가 녹아 기온을 유지하는 기능을 이미 상실했다고 탄식하고 있다. 과장이 아닌 것 같다. 지난해에 경험한 감당하기 어려웠던 태풍을 이제 매년 겪어야 한다고 한다. 마음껏 고기를 먹을 수 있는 대가로 우리가 지불해야 하는 몫이다. 우리가 기쁨이나 슬픔과 같은 감정을 가지게 된 것도 생존을 위해서 얻어진 진화의 산물이라고 한다. 기쁨이나 향락을 추구하는 것에도 세상을 돌아볼 줄 아는 지혜가 약간은 보태져야 덜 민망스러울 것 같다. 김상곤 전 울산시감사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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