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산을 체육공원이라 하였다. 체육은 건강, 공원은 휴양과 유락을 뜻한다. 즉, 남산은 울산시민의 건전한 정신과 건강한 육체를 위해 조성된 동산이라는 말일 것이다.

 그런데 요즈음 남산에 오를라치면 체육공원이란 좋은 이름에 걸맞지 않은 좋지 못한 일들이 너무나 많다.

 길가에 놓여진 생활정보지가 그 용도와는 달리 이슬젖은 운동기구의 등깔개로 씌었다가는 그냥 버려져 온 산을 더럽히고 있는가하면 여기저기 파헤쳐진 구덩이는 등산인의 안전을 위협하는 함정이 되어 있기도 한다.

 그리고 태풍으로 꺾인 마른 나뭇가지는 흉물이 되어 아름다워야 할 남산을 마냥 훼손하고 있다.

 88올림픽이 열린 직후 서울올림픽 조각 공원을 관광했을 때 있은 일례다. 겨레의 자긍심을 한껏 높여준 서울올림픽! 그 열기가 채 가시기 전이라 올림픽 공원은 국내외 관광객으로 매우 붐비고 있었다.

 우람한 경기장과 어울려 세계 명장의 조각들이 제각기 솜씨를 뽐내기도 했다. 높아진 조국의 위상에 한껏 고무되면서 함께간 동료들과 담소하면서 걸었다. 어느 기울게 만든 대형조각품 옆에 다다랐을 때의 일이다.

 기운 조각품 위에 심어진 잔디 위로 미끄럼 타는 아이가 있었다. 미끄럼 모습을 카메라에 담으려고 아이의 어머니는 각도를 맞추느라 이리저리 뛰고 있었다.

 "호르륵" "호르륵" 관리인이 저만치에서 깜짝 놀라 뛰어 왔다. 아이도 어머니도 달아났다. 어머니가 앞서서 깨뜨리는 공중도덕의 부끄러운 모습이 보기 겨워 시선을 돌렸다.

 그런데 이번에는 땅에 떨어진 분홍색 휴지가 눈에 띄었다. 한겹, 두겹". 앞서가던 여러 사람의 칼바람에 가벼운 휴지는 이리저리 뒹굴다 마침내 내 발아래에 왔다. "주어야 할텐데"하면서도 옆으로 죽 늘어선 동료들이 겸연스러워 그만 지나치고 말았다.

 그런데 바로 내 뒤를 따르고 있던 관광객 하나가 스스럼없이 그것을 줍는 것이 아닌가. 말씨로 보아 일본인이었다.

 필자는 박제상 이야기, 임란 때 이야기, 3·1운동 이야기 등 울산과 관련된 역사자료를 살피면서 일본인들의 간악한 소행을 증오하고 있는 터였다. 그런데 이게 무슨 꼴인가?

 내 나라 내 땅에서 왜인들보다 못한 나와 우리임을 깨달으며 자괴감으로 한참동안 눈의 초점을 바로 잡을 수가 없었다.

 그후로 나는 먼저 줍는 의식적 버릇을 붙였다. 휴지줍기는 물론 넘어진 입간판을 바로 세우고 끈풀린 태극기도 바로 걸어놓았다. 그랬던만큼 남산이 오염되는 것이 더욱 싫었다.

 날아 뒹구는 비닐봉지를 길에서 주어 한손에 들어 떨어진 나뭇가지로 집게를 만들어 다른 손에 쥐었다. 그래서 산을 오르며 쓰레기를 주워 담았다. 담배꽁초, 과자종이, 드링크 빈통과 병, 심지어는 한약을 마시고 난 봉지도 솔잎 사이를 헤쳐 꺼내 담았다.

 산위에 올라오니 쓰레기 봉지는 가득 찼다. 봉지를 쓰레기마대속에 넣고는 수도가에 쪼그리고 앉았다. 그때였다. 머리 위에서 "왜 집쓰레기를 산에 갖다 버리느냐"는 어떤 노인의 질책소리가 들려왔다.

 집의 것이 아니고 산을 오르면서 주은 것이라 했더니, 그 노인은 아닌 것 같다고 했다. 줍는 것을 본 사람도 있다고 하자 "데리고 오너라"는 것이었다.

 불신 또 불신". 좋은 일도 마음놓고 할 수 없는 세상. 남산은 버리는 사람만 있고 줍는 사람은 있을 수 없다는 역리적 사고. 언제까지 우리는 이런 부끄러운 민족으로 있어야만 하는가.

 "아름다운 자연, 깨끗한 남산"이란 현수막의 커다란 글씨가 눈에 들어왔다. "산에서 우는 작은 새여 꽃이 좋아 산에서 사노라네" 김소월의 시가 생각난다. 꽃도 새도 사람도 다함께 즐길 수 있는 남산이 됐으면 정말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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