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태완 울산 중구청장

언론을 접하다가 눈앞이 캄캄해지는 상황을 마주할 때가 있다. 잊을만하면 들려오는 아동학대 사건을 접할 때다. 양부모의 학대, 우리사회의 안일한 대처와 방관으로 16개월의 짧은 생을 마감한 정인이의 죽음. 지속적으로 학대를 받다가 여행가방 속에 갇혀 숨진 9살 아이의 사건. 이처럼 차마 상상하기 힘든 어른들의 만행으로 꽃보다 예쁜 아이들의 삶과 꿈, 미래가 꺾인 사건들을 접할 때면 부모의 한 사람으로서 분노가 치솟는다.

지난해 울산지역에서는 어린이집 보육교사들의 아동학대 사건들이 잇따랐다. 구청장이기 이전에 한 사람의 부모이자 사랑스러운 손주를 둔 할아버지로 그때마다 심장이 내려앉는 느낌이었다. 사건이 발생된 지역에 상관없이 언제나 피해 아이의 안부에 대한 걱정이 앞섰다. 최근 일부 피해 아이들의 부모님들을 만나 마음으로 위로하며 지역 행정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노력을 다 하겠다 약속드렸다. 하지만 이미 자녀가 받은 학대 피해가 자신의 탓인 것처럼 자책하고 분노하며 슬픔에 잠긴 그분들의 아픔을 온전히 치유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기에 더 미안하고 송구할 따름이었다.

한때 우리나라는 훈육(訓育)이라는 명목 하에 부모나 스승이 아이를 때리는 문제를 당연하듯 받아들여질 때가 있었다. 다양한 종류의 회초리를 들고 때리는 것은 물론이고 심지어 손과 발을 사용한 폭력도 훈육이라는 미명으로 용납이 됐었다. 아이를 바른 길로 인도하는 훈육이라는 말로 부모와 선생의 폭력이 미화됐었다.

“차라리 회초리로 좀 때렸으면 좋겠다”고 하소연 하는 친구들도 있을 만큼 심각한 경우도 적지 않았다. 힘든 시절이라 부모가 모두 일터로 나가 아이를 돌보지 못하는 가정도 많았고, 그래서 아이들이 학교 등에서 학대수준의 훈육을 당해도 무신경한 경우도 적지 않았다. 오죽하면 선생님께 체벌을 당하고 집으로 돌아와 부당함을 호소해도 “네가 맞을 짓을 했겠지”라는 말로 무시당하거나 역으로 체벌을 더 받는 경우도 있었다.

지금은 체벌로 훈육을 할 수 없는 시대다. 오랜 시간동안 많은 아이들이 체벌 등의 학대로 인해 고귀한 생을 달리했고 그로 인해 늦게나마 법이 강화돼 왔기 때문이다. 이제 학교나 학원, 유치원과 어린이집 등에서 스승에 의한 훈육은 물론이고 가정에서 부모라 할지라도 훈육을 빙자해 아이에게 체벌을 가한다면 법적 처벌이 따른다. 하지만 ‘법보다 주먹이 가깝다’는 자조 섞인 말처럼 여전히 훈육이라는 말로 아이에 대한 체벌이 가정과 학교, 어린이집 등에서 발생되고 이는 결국 끔찍한 사건들로 민낯을 드러내 충격을 준다.

지난 2016년 제정된 아동권리헌장에는 ‘아동은 생명을 존중받아야 하며 부모와 가족의 보살핌을 받을 권리가 있다’고 명시돼 있다. 모든 형태의 학대와 방임, 폭력과 착취로부터도 보호받을 권리가 있다는 사실도 분명히 한다. 이 문장들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단순하다. 부모나 스승을 비롯한 모든 어른들이 아이를 독립된 인격체로서 존중하고 보호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모두가 알고 있듯 아이는 우리의 미래다. 그런 아이가 비혼, 줄어들거나 늦어진 결혼, 결혼 후 아이를 낳지 않는 딩크족 등이 만연한 사회 분위기 속에서 점점 줄어들고 있다. 1970년대 “아들딸 구별 말고 둘만 낳아 잘 기르자”는 구호는 이제 제발 둘만이라도 낳아달라는 부탁으로 바뀌어도 모자랄 상황이 됐다. 인구절벽을 걱정하며 출산율의 저하를 극복하고자 정부는 물론이고 전국의 모든 지자체가 다양한 지원 정책들을 펼치지만 상황은 점점 더 악화되고 있다. 이런 가운데 힘들게 얻은 우리 아이들을 아동학대로 잃어버린다면 또는 아이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평생 안겨 올바르게 자라지 못하게 만든다는 게 가당키나 한 일인가. 우리사회가, 지역이, 마을이 모두 합심해서 아이를 존중하고 보호해야 한다. 그렇지 않는다면 결국 우리의 미래는 없거나 밝지 않다. ‘꽃으로도 때리지 말라’는 유명한 말을 우리 모두가 실천해야 하는 이유 중 하나다. 박태완 울산 중구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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