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익 추구하거나 지키려는 행위
권력의 ‘양면성’ 제대로 알아야
주권자로서 올바르게 대처 가능

▲ 유영국 울산과학대 교수·정치학

‘권력의 두 얼굴’은 1962년 미국의 피터 바크라크(P. Bachrach)와 모턴 바라츠(M.S. Baratz)가 공저한 논문의 제목(The Two Faces of Power)을 그대로 옮긴 것이다.

마치 어떤 칼럼의 제목같이 보이지만 아리송한 현실 문제의 본질을 해명하는 데 정치학이 기여한 값진 논문 중의 하나다. 원래 이 논문은 미국 지방정부의 정책 결정이 역내 특정의 엘리트 집단에게만 독점되는 것이 아니라 여러 집단이 관심사 별로 공평하게 분점되면서 다원적 이상을 잘 실현하고 있다는 로버트 다알(R. Dahl)의 주장을 반박하기 위하여 씌어졌다. 그들에 따르면 상공업을 중심으로 하는 사회적 지배집단은 당장 그들의 목표가 되는 부문에만 관심을 쏟고 자신들이 이미 기득권을 가졌거나 자신들의 이익에 도움이 되지 않는 부문에는 별다른 신경을 쓰지 않아서 그들의 전반적 영향력이나 권력행사가 두드러져 보이지 않았던 사정을 간과했기 때문에 엘리트 지배의 엄연한 현실을 부정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정치학이나 사회학의 전통적인 관념에서 볼 때 정책을 결정하는 ‘권력’(power)이라는 것은 내가 원하는 바를 이루기 위해 타자에게 어떤 조치를 합법적으로(때로는 합법을 가장해서) 행할 수 있는 힘이라고 생각해 왔다. 그리고 일반적으로 그러한 정의에 대개 동의할 것이다. 그런데 그 이면을 뒤집어보면 나 또는 내가 속한 집단의 의도나 이해관계가 이미 기정사실로 체제화 되어 있을 경우에는 굳이 어떤 행동이나 조치를 취할 필요도 이유도 없다. 즉 이루어지지 않은 나의 목적이 있을 때는 어떤 행동을 취함으로써 그 목적을 이루려 하지만, 이미 이루어졌거나 누리고 있는 나의 기득권에 대해서는 (그 때문에 누구인가 불이익과 고통을 호소하거나 심지어 저항하고 있더라도) 양보하거나 현실을 변화시킬 아무 행동도 취하지 않고 방치해 두는 것이 곧 권력이다.

우선 서구 역사에서 한번 확인해 보자. 자연법사상을 무기로 절대왕정의 억압 질서를 타파한 근대 시민계급의 혁명 활동이 ‘행동’으로서의 권력행사였다면, 18~19세기의 자유방임주의는 이미 체제화된 자본주의 질서를 공고히 하려는 ‘무 행동’ 전략을 반영한 권력행사였다. 한국의 경우 1972년 10·17 비상사태 선포로 대통령의 종신집권을 꾀한 박정희 정부의 유신 쿠데타는 적극적으로 어떤 행동을 취함으로써 자기 이익을 추구한 권력이었으며, 학생과 재야 세력의 목숨 건 반대와 저항에도 유신헌법의 개정을 향한 어떤 결정도 취하지 않은 것은 자기 이익을 지키려는 무 행동의 권력행사였다. 바크라크와 바라츠가 묘사한 ‘권력의 두 얼굴’이란 권력 작동의 그러한 양면성을 정확히 지적해 준 표현이었다.

이와 같은 권력의 양면성을 우리가 제대로 알고 있을 때(알고 있어야만), 정치 사회적 현실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장면들과 그에 관련된 행위주체들의 옳고 그름을 눈앞에서 바로 볼 수 있고 주권자로서 올바르게 대처할 수도 있다. 검찰이 기를 쓰고 수사 하려는 사건과 모른 척 덮어두려는 사건은 대관절 무엇이 달라서일까. 위험의 외주화, 아니 죽음의 외주화를 없애는 제도 개혁은 왜 그리도 어려울까. 죽음의 택배노동이 계속되는데도 당일배송, 총알배송, 로켓배송, 새벽배송 같은 구호를 꾸짖고 추방하지 못하는 우리들 자신은 어떤 권력의 포로일까.

전국의 균형발전을 그렇게 부르짖으면서도 정작 행·재정적 권한의 지방이양은 누가 그렇게 방관하며 가로막고 있을까. 2004년 신행정수도특별법에 대하여 ‘수도는 서울’이라는 관습헌법을 내세우며 그 법률이 위헌이라던 당시 헌재의 판결은 상식에 의하든 법리에 의하든 실로 이해하기 어려웠다. 성문헌법에 규정되지 않은 관습헌법을 위헌판단의 근거로 삼으면서 다른 한편으로 그 성문헌법이 개정되면 합헌의 조건이 충족된다는 판결논리는 그야말로 자가당착이기 때문이다. 인구 절반을 한곳에 불러들여 살고 있는 국민적 문제의 절박함 보다는 수도 이전에 반대하던 일부 세력의 무 행동 권력행사를 정당화시켜준 데 불과했던 그 사건이, 작금의 부동산 광풍에 끼친 직·간접적 악영향은 또 얼마나 되었을까. 유영국 울산과학대 교수·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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